중시문과(重試文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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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에 한 번씩 문신 당하관을 대상으로 시행한 문과 시험.

개설

중시는 10년에 한 번씩 병년(丙年)에 해당되는 해에 시행되었다. 문신들이 출신(出身) 후 학업을 폐지하지 않도록 만든 시험으로 문신 당하관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다. 시험 시기와 방법, 인원은 그때그때 왕의 품지를 받아서 정하였다. 시험과목은 대개 표(表)·책(策) 중의 1편을 보였다. 시관은 독권관(讀卷官) 3명과 대독관(對讀官) 4명으로 총 7명이었다. 급제자는 승진을 시켜 주었다. 조선시대에 실시된 중시는 모두 52회였다.

내용 및 특징

처음 중시가 거론된 것은 정종대였다. 하륜(河崙)이 한번 과거에 오르면 책을 버리고 강론을 하지 않아 문관 중에 직책에 마땅한 사람이 많지 않으니 급제한 사람들에게 중시를 보여 탁용에 대비하도록 하자고 하였다(『정종실록』 2년 6월 2일).

중시 실시가 구체화된 것은 태종대에 와서였다. 1406년(태종 6) 문과중시에 종3품 이하는 모두 응시하게 하고 경서를 숙독한 후 책을 보지 않고 강송(講誦)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6년 5월 13일). 실제로 중시가 처음 실시된 것은 1407년(태종 7)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중시는 당하관만 응시할 수 있으며, 선발 인원과 시험 방법은 그때그때 왕에게 아뢰어 왕명을 받아 정한다는 것 외에 자세한 규정이 없었다. 시험과목에 대해서도 따로 정해진 것이 없이 시험 때마다 정하였다. 1447년에 시행된 중시문과의 시험 과목은 책문(策問)과 표(表) 각 한 가지를 시험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9년 8월 5일). 1479년의 중시문과에서는 『오경(五經)』과 『통감강목(通監綱目)』 중에서 하나를 뽑아 시험 보게 하였다(『성종실록』 10년 1월 23일).

『속대전』에 의하면 중시의 시험 과목은 대책(對策)·표(表)·전(箋)·조(詔)·제(制)·논(論)·부(賦)·잠(箴)·명(銘)·송(頌) 가운데서 1편으로 하였다. 대개 표와 책 중의 하나를 왕의 친림 하에 근정전이나 인정전 등의 전정(殿庭)에서 시험 보게 하였다.

시관은 독권관 3명과 대독관 4명으로 총 7명으로 구성되었다. 중시가 당하관 관료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므로 시관들은 모두 당상관으로 차정하였다.

중시의 선발 인원도 그때그때 왕에게 아뢰어 정하여 일정한 정원이 없었다. 가장 적게 뽑았을 때의 합격자 수가 3명이었고, 가장 많이 뽑은 것은 1457년(세조 3)의 21명이었다. 보통 10명 이내를 뽑았다.

급제자에게는 승진의 혜택이 주어졌다. 조선초기에는 급제자에 대한 승진 규정이 없었다.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중시 급제자에 대한 가계(加階)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원래 품계를 가지고 있는 문과 급제자의 규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중시 갑과 1등은 4품계, 갑과 2등과 3등은 3품계, 을과는 2품계, 병과는 1품계를 승진시켰다. 만약 갑과 급제자가 당하관 품계가 다하였을 경우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다. 7품 이하의 참하관으로 급제한 사람은 등수에 관계없이 모두 6품으로 승진시켰다.

변천

처음에는 정년(丁年)에도 시행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주로 병년(丙年)에 실시하였다. 병년 설행은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응시 자격은 처음에는 중앙과 지방의 종3품 이하로 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당하관 이하로 규정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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