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왕(中山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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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 중 중산의 왕을 칭하는 말이었다가 1429년 통일 후 유구국왕을 통칭하게 된 말.

개설

14세기 초에 유구에는 3개 세력이 서로 할거하며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즉, 오늘날 오키나와[沖繩] 본도의 중부·남부·북부가 각기 중산국·산남국·산북국 등 3개 소국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며 발전하다가 명나라 건립 이후 점차 통일되어 갔다. 이의 단초를 열기 시작한 것이 유구의 중산국이다.

내용 및 특징

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던 유구국이 중산국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룬 이후 중산왕이 통일된 유구국 왕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통일 전에는 각각 세력별로 산남왕(山南王)·산북왕·중산왕(中山王) 등으로 불리던 것이 통일 이후 유구국왕으로 바뀌었고, 중국에서 유구국의 왕을 책봉할 때 공식적으로 불린 명칭은 ‘유구국 중산왕’이었다.

1368년(고려 공민왕 18)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후 각국에 사신을 보내 명의 건국 사실을 알리면서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후 1372년(고려 공민왕 21) 중산국왕 찰도(察度)가 3국 중 가장 먼저 명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이후 10년 내외 사이에 산남국·산북국도 명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 이어 1380년(고려 우왕 6) 산남국이, 1383년(고려 우왕 9) 산북국이 각기 명에 조공을 하였고, 황제로부터 이들 나라의 왕이 책봉을 받았다. 이들 각국이 통일을 이룬 것은 1429년이다. 1406년(태종 6) 산남국 좌부(佐敷) 지방의 안사(按司)사소(思紹)와 그의 아들 상파지(尙巴志)가 중산국으로 쳐들어가 중산왕 무령(武寧)을 살해하였다. 이후 사소는 중산왕의 세자를 자칭하여 명에 보고하였고, 사소는 마침내 명의 황제에 의하여 중산왕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사소의 아들 상파지가 1416년 판안지(攀安知)가 다스리던 산북국을 쳐들어가 멸망시킴으로서 일단 중산국과 산북국의 2국 통합을 이루었다. 1422년 사소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세자 상파지가 유구국 중산왕으로서 명의 책봉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1429년(세종 11) 상파지는 마침내 남쪽으로 타노매(他魯每)가 다스리던 산남국까지 멸망시킴으로서 유구는 통일된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된 이후로도 역대의 왕은 모두 명·청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이전의 중산왕처럼 ‘유구국 중산왕’으로 표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는 중산왕에 대한 기록이 태조대부터 정조대까지 수십 회 등장하였다. 대체로 왜구에 의하여 납치되어 간 피로인이나 풍랑을 만나 떠내려간 표류인의 송환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때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인하여 망명한 이들에 관한 기사도 등장하여 유구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1392년(태조 1)에는 유국국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거나(『태조실록』 1년 8월 18일), 중산왕 찰도가 신하라고 칭하면서 통사(通事)이선(李善)을 보내어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왜구에 의하여 잡혀간 피로인 8명을 송환하였고, 조선에 망명한 산남국의 왕자를 송환해 달라고 요청한 기사가 등장하였다(『태조실록』 1년 윤12월 28일). 그로부터 6년 뒤인 1398년(태조 7년)에는 유구국 산남왕 온사도(溫沙道)가 중산왕에 의하여 추방되어 조선 진양(晉陽)에 안착한 기사가 등장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16일). 그러나 피로인의 송환은 이미 고려말에도 있었다. 가령 1388년(창왕 원년) 유구국 중산왕 찰도의 신하가 왜구에 잡혀간 피로인을 송환한 일이 그것이다. 왜구들이 해안을 출몰하며 조선인을 납치해 갔기 때문에 피로인 송환은 조선건국 이후로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1394년(태조 3) 9월 9일 유구국 중산왕이 유구에서 조선으로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한 기사가 등장하였다. 당시 중산왕 찰도(察度)는 사신을 보내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조선인 피로인 남녀 12명을 돌려보냈다. 더불어 그는 조선에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송환해 달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그 나라 세자 무령(武寧)도 조선의 왕세자에게 바치는 글월과 예물을 보내왔다(『태조실록』 3년 9월 9일).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유구국 중산왕 상파지, 유구국 중산왕 상금복, 유구국왕 상태구, 유구국왕 상덕이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신숙주가 유구국왕의 소재가 중산이라고 하므로 중산왕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또한 거기서 보내온 사절이 본국인도 있고 위탁을 받은 일본 상인도 있으며, 국서 양식도 일정하지 않았다. 전문(箋文)·자문(咨文)·치서(致書) 등이 두루 있었다. 왕의 칭호와 성명도 일정하지 않으며, 유구국이 멀리 있기에 정확히 모르니, 앞으로 더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1409년(태종 9)부터 유구국 중산왕 사소가 보내온 국서의 양식은 자문의 양식이었다. 사소의 자문에서는 조부왕 찰도와 아버지 무령이 잇따라 서거하였고, 각 지방 세력이 서로 다투었다는 내용을 밝혔고 명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았다는 내용도 밝히고 있다. 자문은 조선 왕과 명·청의 육부(六部) 관아 사이에 오고 간 외교문서이다. 유구의 외교문서인 역대보안을 보면 1431년(세종 13)부터 1638년(인조 16)까지 유구에서 보내온 국서는 자문의 양식이었다. 이것은 중국을 의식하여 사용한 격식이었다. 사소가 무령왕의 아들로서 중산왕 세자를 자칭하여 중산왕으로 책봉받은 때로부터 조선 측에는 자문 양식의 외교문서를 보냈다. 그 후 세종·단종·세조·연산군·선조·광해군·인조대에도 중산왕이나 중산왕세자가 보내온 자문이 사신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유구의 국서 왕래는 1643년 명이 멸망한 후 단절되었다. 그 후 중산왕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는 않지만 청대 유구국왕에 대한 책봉조서에서도 중산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의 풍속에 관한 기사도 등장하였다. 1786년(정조 10) 3월 27일 청국을 다녀온 수역(首譯)이담(李湛)이 기록한 별단의 내용이 그중 하나이다. 별단은 왕에게 보고하는 본 내용의 문서에 참조할 수 있도록 덧붙이는 문서이다. 이담의 별단에는, “연경에 도착하여 유구국 사신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황박(黃帕)과 흑포(黑布)를 착용하였는데, 옷소매가 넓으며 짧았습니다. 그 나라는 일본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5,000~6,000리이고, 3성(省)을 두어 35개 부(府)를 통솔하며, 중산에다 도읍을 두고 중산왕이라고 일컫는데 명나라 초기부터 상씨(尙氏)가 계승해 왔고, 지금 왕의 이름은 목(穆)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변천

유구왕국에는 15세기부터 1879년 일본에 의하여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2개의 상씨왕조가 있었다. 사소를 비롯하여 제1상씨왕조와 1469년 7대 상덕왕이 죽은 후 대외교역 책임자였던 김환(金丸)이 정변을 일으켜 세운 제2상씨왕조가 있었다. 제1상씨왕조의 왕으로는 사소·상파지·상충(尙忠)·상사달(尙思達)·상금복(尙金福)·상태구(尙泰久)·상덕(尙德)이 있었다. 정변을 일으킨 김환도 옛 사소 부자의 예에 따라 상덕의 세자 상원(尙円)으로 자칭하여 명의 책봉을 받았다. 제2상씨왕조에는 상원·상선위(尙宣威)·상진(尙眞)·상청(尙淸)·상원(尙元)·상영(尙永)·상녕(尙寧)·상풍(尙豊)·상현(尙賢)·상질(尙質)·상정(尙貞)·상익(尙益)·상경(尙敬)·상목(尙穆)·상온(尙溫)·상성(尙成)·상호(尙灝)·상육(尙育)·상태(尙泰) 등 19명의 왕이 있었다. 그중 상현은 1641년에 즉위하였지만 명·청 교체시기를 만나 책봉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타 상선위·상익·상성의 경우 재위 시간이 짧아 책봉을 받지 못하였다. 그 외의 왕은 모두 명과 청에 의하여 유구국 중산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들 유구의 역대 왕들은 조공책봉 체제에 따라 모두 유구국 중산왕을 칭하였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민덕식·손승철·이훈·정성일·하우봉 외, 『朝鮮과 琉球』, 아르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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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승철, 「朝鮮前期 對琉球 交隣體制의 構造와 性格」, 『西巖趙恒來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 양수지, 「琉球의 왕권과 그의 상징물」, 『동북아문화연구』 23, 2010.
  • 이훈, 「朝鮮後期 漂民의 송환을 통해서 본 朝鮮·琉球관계」, 『史學志』 27, 1994.
  • 양수지, 「조선·유구관계 연구-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