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통영)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죽도 |
한글표제 | 죽도 |
한자표제 | 竹島 |
관련어 | 임진왜란(壬辰倭亂), 통영(統營), 한산도(閑山島)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지명 |
지역 | 대한민국 |
집필자 | 허지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죽도(竹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3년 12월 10일, 『선조실록』 29년 6월 20일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딸린 섬.
개설
동경 128도 32분, 북위 34도 43분에 위치한다. 면적은 0.67㎢이고, 해안선 길이는 3.0㎞이다.
명칭 유래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에 본영을 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함선(艦船)들이 무기 제조에 필요한 대나무를 이곳에서 베어 사용하면서 죽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
섬은 동서 방향으로 길며, 타원형의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 높이는 128m다. 북쪽 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선박이 쉽게 정박할 수 있다. 반면에 나머지 해안은 깎아 세운 듯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수심은 30m에 이른다.
위치 비정
통영(統營)에서 동남쪽으로 15㎞, 한산도에서 동남쪽으로 3㎞ 지점에 있다.
관련 기록
1431년(세종 13)에 죽도의 서쪽 바다에서 해적을 토벌한 제주 사람 천호(千戶)김석(金石) 등 8명에게 쌀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3년 12월 10일).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 해안 지역에 왜성을 쌓고 병력을 주둔시켜두었다. 죽도에는 일본군 제2군의 장수인 과도직무(鍋島直茂) 부자가 주둔하였다. 이들은 강화교섭 기간 중 다수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전쟁 기간 내내 죽도에 주둔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96년(선조 29)에 조선 국왕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堂上)을 인견했을 때 죽도에 왜적이 가장 성한 것과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는 것에 대해 묻고 이에 대해 유성룡(柳成龍)이 죽도에 왜적이 가장 많다고 답변한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29년 6월 20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