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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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李滉)이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편찬한 유학서다.

개설

이 책은 이황이 주희(朱熹)의 저작집인 『주자대전』을 처음 접한 것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던 중인 1543년(중종 38)의 일이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한 1549년(명종 4) 이후 이황은 본격적으로 이 책을 탐구하였다. 그 중에도 가장 주목한 부분은 48권에 달하는 서간문들이었다. 이 책에는 주희가 사우들과 나눈 학문적 교유 관계와 국가와 시대에 대한 고민 등이 폭넓게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하여 주자학의 큰 줄기를 파악한 이황은 공자의 어록집인 『논어(論語)』가 공자의 학문을 이해하는 기본서였던 것처럼, 주자의 서간문들도 주자학을 학습하는 입문서라고 보았다.

이황은 48권의 서간문 중에서 긴요한 부분만을 정선하여 14권 7책으로 재편집하였는데, 처음으로 성편한 것은 1558년(명종 13)이었고, 이황의 제자 황준량(黃俊良)이 1561년(명종 16) 성주에서 최초로 간행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이황이 주희의 『주자대전』 중에서 서간문을 편집한 유학서로, 여러 차례 간행되어,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초간본은 1561년(명종 16) 성주부에서 간행된 성주간본(星州刊本)으로서, 황준량이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간행한 것이고, 이어서 유중영(柳中郢)이 정주목사로 있으면서 간행한 정주본(定州本)과 1611년(광해군 3)에 기대승(奇大升)이 전주에서 간행한 전주본(全州本) 등이 있다. 전주본의 권두에는 이황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황준량과 기대승의 발문이 있다.

이황은 1543년(중종 38) 중종의 명으로 『주자대전』을 간행하면서,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주자대전』은 주희의 시문을 포함한 사상을 수록한 것으로 9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고, 그 가운데 주희가 당시 학자, 공경대부, 문인 등 각계의 인사들과 사회, 정치, 경제, 학문 등 의견을 주고받은 서간문도 48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간문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주희의 학문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황은 주희의 서간문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학문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발단흥기지처(發端興起之處)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문인(門人)과 지구(知舊)들 간에 왕복한 서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대전』 가운데 1,700여 편의 서찰 중 1,008편을 뽑아, 20권으로 만든 책이 『주자서절요』이다.

서지 사항

10권 8책, 2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활자본 및 목판본이다. 사주쌍변이고, 10행 18자, 계선, 주쌍행, 상하내향삼엽화문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21.3×33.5㎝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543년(중종 38) 이황은 중종의 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 반포된 『주자대전』 또는 『성리대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던 『주자전서』를 보게 되었는데, 이는 주희의 시문과 사상을 수록한 것으로 9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이다. 그 가운데에는 주희가 당시의 학자, 공경대부와 문인 등 각계의 인사들과 사회· 정치·경제·학문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48권에 달하는 서간문이 포함되어 있다.

서간문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사상을 집약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서, 당대의 유종(儒宗)이라는 존경 받던 주희의 학문과 사상도 이 서간문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이황은 이러한 점에 주목, 주희의 서간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 것과 학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을 빼고, 정주학의 핵심이 된다고 인정되는 성리학 경전 연구, 정치· 사상 등에 관한 내용만을 추려서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는데, 그만큼 이 책을 통해 저자인 주희의 대인 관계, 특히 사우 관계, 당시 주희와 교유하던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의 역사, 그 시대의 용어와 방언 등도 알 수 있다. 또한 주자학의 입문서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이 책은 주희를 배우는 기초 자료이며, 주희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료였다. 처음에는 48권에 달하는 『주자대전』의 서찰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추려, 문인들을 시켜, 초사(抄寫)해, 14권 7책으로 만들었으나, 간행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도 오사렴(吳思廉)과 왕백(王柏)이 『주자서』를 편찬하였다. 이에 이황의 문인들은 주희의 집주(集注)와 제설(諸說)이 이미 세상에 출간되었는데, 서찰만은 널리 유포되지 않고 있음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 스승을 종용해, 일록과 주해를 달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내용을 분류하면, 권1·2는 시사출처(時事出處), 권3은 왕장문답(汪張問答), 권4는 여유문답(呂劉問答), 권5는 진육변답(陳陸辨答), 권6은 문답론사(問答論事), 권7은 문답경전(問答經傳), 권8∼18은 지구인문답(知舊人問答), 권19는 속집, 권20은 별집으로 되어 있다.

본래 이황의 편찬본은 14권 7책이었으나, 초사하는 과정에서 18권으로 분량을 조절했고, 속집과 별집은 문인들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편차의 순서는 공경대부와의 서간을 우선 편차하고, 지구(知舊)·문인들의 문답 순으로 배열하였다.

지구 가운데는 주희와 학문적인 견해의 차이로 논쟁을 벌였던 왕응신(汪應辰)·장식(張栻)·여조겸(呂祖謙)·유청지(劉淸之)·육구연(陸九淵) 형제, 진량(陳亮) 등과의 문답을 시대 순으로 배열하였다.

매 권수에는 수록된 사람들의 약전을 기재하고 매 서찰의 제목 밑에 소주(小註)로 서신 왕래의 시기를 기록하였다. 서찰의 끝에는 고사·인물·지명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주희의 사상을 총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리학 발달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성리학 연구가 활발해진 것도 『주자서절요』의 출간으로 일어난 학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주자서절요』가 나온 뒤 영남학파는 물론 기호학파에서도 주자서 및 『주자대전』 전반에 대한 연구가 수없이 나왔다. 이 책은 그 방향으로 제시한 자료로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류준필, 「퇴계(退溪)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주자문헌(朱子文獻) 편집 방식-『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권1과 『주자대전(朱子大全)』 권24~26의 대비-」, 『퇴계학논집』 제14집, 퇴계학연구원, 2008.
  • 유탁일, 「주자서절요 주석의 맥락과 그 주석서들」, 『서지학연구』 5·6호, 서지학회, 1990.
  • 유탁일, 「주자서절요의 주석서에 대하여」, 『퇴계학논총』 제3집, 퇴계학부산연구원, 1997.
  • 최채기, 『退溪 李滉의 『朱子書節要』 編纂과 그 刊行에 관한 硏究』, 성균관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