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언해(周易諺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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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주역언해 |
한글표제 | 주역언해 |
한자표제 | 周易諺解 |
분야 | 언해서 |
유형 | 한글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교정청 |
간행처 | |
간행년일 | 1606 |
권책수 | 9권 6책 |
사용활자 | 목판본 |
표제 | 주역언해(周易諺解)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주역언해(周易諺解) |
이 책은 조선 선조 때 교정청(校正廳)에서 『주역(周易)』에 한글로 토를 달고, 우리말로 직역한 언해서다.
개설
이 책은 『주역』을 한글로 풀이한 언해서다. 원래 전체는 9권 5책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 4책만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원문에는 한글로 쓴 토와 한자의 발음이 달려 있다. 『주역』은 유교의 경전 가운데 음양과 오행이라는 체계로 세계와 우주를 해석한 철학책이다. 성리학 대표적인 저술로 다양한 주석과 논서들이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들어와, 그 이후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혀졌다.
언해본의 간행은 선조의 명에 의해 교정청에서 1585년(선조 18)부터 1593년(선조 26)까지 주역을 포함한 삼경언해의 간행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인 1606년(선조 39)에 삼경 중 『시경』과 『서경』을 제외한 『주역언해(周易諺解)』가 먼저 이루어졌다.
『주역언해』는 이후로 여러 이본이 간행되었다. 대부분의 간행본에는 내사기가 있는데, 어떤 언해본에는 간기가 없어, 어느 때 간행된 것인지 추정하기 어렵다. 또한 금속활자 주역언해본으로는 1695년(숙종 21)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무신자 활자본(戊申字活字本)도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조선 중기 선조 때 교정청에서 『주역』에 한글로 토를 달고, 우리말로 직역한 것이다.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있는데, ‘만력삼십사년유월일(萬曆三十四年六月日)’의 내사기가 있어서, 1606년(선조 39)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을 앞에 싣고, 뒤에 언해를 붙였는데, 원문에는 한글토와 한자음이 있고, 언해문에도 한자와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다. 다른 사서삼경의 언해와 마찬가지로 『주역언해』도 이본이 많다.
세경오중춘개간전주하경룡장판(歲庚午仲春開刊全州河慶龍藏板)·경진신간내각장판(庚辰新刊内閣藏板)·병술신간영영장판(丙戌新刊嶺營藏板)·경인신간영영장판(庚寅新刊嶺營藏板)·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무인신간영영장판(戊寅新刊嶺營藏板)·을축칠월일영변부개간(乙丑七月日寧邊府開刊) 등의 간기를 가진 것들이 있다. 모두 목판본인데, 앞에서부터 차례로 1810년(순조10)·1820년(순조 20)·1826년(순조 26)·1830년(순조 30)·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인본(戊寅本)과 을축본(乙丑本)은 간행연도를 알 수 없다.
그밖에 1695년(숙종 21)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무신자활자본이 있다. 17세기 초에 간행된 대부분의 언행본과 마찬가지로 선조본은 방점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ㆁ’과 ‘ㅿ’의 표기도 혼동되어 있으며, 어말자음 ㅅ과 ㄷ이 혼기(混記)되어 있고, 중철(重綴) 표기가 보이며, 어간말자음 군인 ‘ㄼ’이 ‘ㅂㄹ’로 표기된 것도 보인다. 이 책은 근대국어 초기의 언어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좋은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서지 사항
9권 6책 210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사주단변이고, 광곽은 24.7×36.0cm이다. 20행 18자의 유계, 상하향2엽화문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25.0×54.0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주역』을 한글로 풀이한 책으로, 선조의 명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주역』은 중국 주(周)나라의 문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유교(儒敎)의 중요한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데, 팔괘(八卦)의 풀이를 주 내용으로 독특한 세계관과 윤리학설 등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선조 때 교정청 설치하여 번역본을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책이 많이 소실되자 1606년(선조 39)에 재간행하였다. 원문을 앞에 싣고 뒤에 언해를 붙였는데, 원문에는 한글토와 한자음이 있고 언해문에도 한자와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다.
조선의 선조 때에 국가정책으로 경전언해작업이 당대 경학의 대가들이 소집되어, 진행이 되었을 때에도 최계의 『칠서석의(七書釋義)』가 저본(底本)이 되었으니, 이황의 경학적·성리학적 위상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역해석이 충분히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황의 『주역석의(周易釋義)』는 1419년(세종 1)에 수입한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하여, 정자(程子)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모두 적용하여 절충하고, 자신의 역학관으로 해석한 것인데, 한국 역철학사상에 철학적 해석은 초유의 일이다.
『주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요경전으로 간주되어 장구한 세월동안 연구되어 왔지만, 아주 난해하여 본지(本旨)를 알기가 어려워서, 16세기의 최계에 의하여 비로소 올바른 석의(釋義)가 이루어진 것은 매우 의의가 있다. 이황의 『사서삼경석의(四書三經釋義)』 일곱 책이 선조 대에 국가정책으로 설치된 교정청의 언해작업의 저본으로 삼아졌으며, 여기서도 아무리 국책사업이었지만, 칠서 이상으로 언해가 진전되지는 못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교정청은 선조 18년(1585)에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1601년(선조 34)에 설치된 교정청에서 언해작업이 다시 진행된 바 1603년(선조 36)에 삼경언해(三經諺解) 사업은 『주역언해』를 재교할 만큼 진전되었다가, 1606년에야 출간되었다.
교정청의 언해 작업 과정에서 이황의 제자인 윤근수(尹根壽)가 총재(總裁)했고, 정구(鄭逑) 등 많은 퇴계학파와 제자가 참여하여, 사실상 이황의 경서석의에 나타난 경학설이 국책으로 시도한 언해 거의 적용된 것이다. 석의로 인하여 한국역학사상 주역 연구의 새로운 경지가 개척되고, 방향설정이 확고해진 것은 한국 성리학 연구에도 큰 지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어려운 『주역』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잇게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으며, 근대국어 초기의 언어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국어사연구의 좋은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김기화, 「〈七書房〉의 출판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제43집, 한국서지학회, 2009.
- 김익수, 「退溪의 『周易釋義』에 對한 繼承發展을 爲한 思想史的 硏究」, 『한국사상과 문화』 35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06.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글문헌 해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 이충구, 「周易諺解의 過程과 特徵」, 『동양철학연구』 14권, 동양철학연구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