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주(周防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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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구현(山口縣) 동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의 하나로 산양도(山陽道)에 속하는 지역이다. 겸창(鎌倉)시대에는 동대사(東大寺)가 관할하였고,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대내씨(大內氏)가 이 지역의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직을 담당하였다. 강호(江戶)시대에는 모리씨(毛利氏)가 지배하였고, 장주번(長州藩)의 지번(支藩)인 덕산(德山)과 암국(岩國) 2개의 번이 있었다. 1871년 산구현에 통합되었다.

명칭 유래

646년 일본에서 조정 안의 혁신파가 벌인 대규모 정치 개혁인 대화개신(大化改新)이후에 설치된 국이다. 이 지역은 대화개신 이전에는 주방(周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이름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697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다. 주방(周防)이라는 국명(國名)은 예전부터 중앙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던 세습적으로 주방 지역을 다스리던 호족인 주방국조(周防國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 환경

숙지(寂地)와 봉편(鳳翩) 두 산지가 북쪽 경계선을 이루고, 전역에 산지가 펼쳐져 있다. 뇌호(瀬戶) 안쪽 경사면을 금천(錦川)·도전천(島田川)·좌파천(佐波川)·심야천(椹野川) 등이 흐르고, 광뢰(廣瀨)·구가(玖珂)·산구(山口) 등의 작은 분지와 연안 쪽에 암국안(岩國岸)·광(光)·방부(防府) 등의 충적(沖積)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선에서 멀리까지 수심이 얕은 개펄이 많다. 내해(內海)에는 옥대도(屋代島)를 비롯하여 많은 작은 섬이 있다. 본주(本州)의 서쪽 끝에 가까우며, 일찍부터 중국과 조선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구주(九州) 북부 지역과 뇌호 안쪽, 기내(畿內) 지방의 문화가 교차하는 거점이었다.

형성 및 변천

대화개신 이후에 설치되었다. 중세 시기 이후에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평씨(平氏)와 지방 세력인 원씨(源氏)가 일본 각 지역에서 벌였던 전쟁으로 불에 타 버린 내랑에 있는 동대사 재건에 재정이 필요해졌다. 이를 위하여 승려 중원(重源)이 주방국으로 왔다. 중원은 지방정치를 수행하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던 구획인 국아(國衙)의 지배 기구를 정비하고 동대사 재건을 위하여 목재를 벌채하여 내랑으로 보냈다. 중원은 10년 후인 1195년에 동대사의 재건이라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후 국아의 관료였던 대내씨가 세력을 확대하였다. 실정(室町)시대에 들어와 대내씨는 주방국과 장문국(長門國)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 산구에 자신의 성(城)을 쌓고 도시를 만들었다. 또한 실정막부(室町幕府) 내에서도 수호대명(守護大名)으로 중시되면서 더불어 산구도 번영하였다.

주방주에서는 1463년(세조 9)부터 1502년(연산 8)까지 조선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세조실록』 9년 7월 5일)(『연산군일기』 8년 1월 3일)

1551년 가신이었던 도청현(陶晴賢)에게 대내씨가 멸망당하였고, 1555년에는 도청현도 모리원취(毛利元就)에게 패배하여 주방은 모리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871년에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암국 지방은 암국현(岩國縣), 나머지는 산구현이 되었으나 같은 해 말 주방·장문 두 국은 산구현으로 통합되었다.

위치 비정

동쪽은 안예국(安藝國: 현 광도현(廣島縣)), 서쪽은 장문국(長門國: 현 산구현 서쪽), 북쪽은 석견국(石見國: 현 도근현(島根縣))과 장문국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뇌호내해(瀨戶內海)와 면하고 있다.

참고문헌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