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조(宗義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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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대마도의 영주.

개설

종의조(宗義調)는 종씨 16대 당주 종청강(宗晴康)의 아들로, 초명은 의친(義親)이다. 1553년 청강으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종씨 17대 당주가 되었으며 의조(義調)로 개명하였다. 부친 청강의 유지를 이어 대마도 통치에 힘썼다. 대마도는 경제적으로 조선과의 통교가 절대적이었지만, 삼포왜란·사량진왜변으로 조선과의 통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조선과의 통교는 1547년 정미약조를 통하여 회복되었지만 교역선인 세견선 수의 감소 등 대마도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많았다.

의조는 조선의 통교 억제책을 완화시키고자 왜구 관련 정보를 조선에 제공하는 한편 1555년 발생한 을묘왜변의 사후 처리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이를 토대로 조선에 거듭 세견선 수의 증가를 요청하여, 1557년 조선과 정사약조가 체결되어 세견선 수를 종래의 25척에서 30척으로 늘이는 데 성공하였다.

내용 및 특징

1559년 15대 당주 종장성(宗將盛)의 이복동생인 와내조친(窪奈調親) 등이 모반을 일으켰다. 본래 대마도에는 종씨의 분가가 38가나 있었고 그 사이에서의 주도권 싸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었다. 의조의 부친인 청강은 종씨 세력을 통일하기 위하여 1546년 본가 이외의 종씨 성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의조는 반란을 진압하고 반대 세력을 일소하여 본가 중심의 실질적인 종씨 통일을 이루었다.

1563년 장군 족리의휘(足利義輝)로부터 찬기수(讚岐守)에 임명되었다. 1566년 15대 당주 종장성의 차남 종무상(宗茂尚)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해 어서전(御西殿)이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한재일구(閑齋一鷗)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가독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은 여전히 의조에게 있었다. 특히 16대 무상은 병약하여 1569년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동생인 종의순(宗義純)이 뒤를 이었지만 의순도 1579년 은거하였다. 그 뒤는 이들의 친동생인 12세의 종의지(宗義智: 장성의 5남)가 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의조는 도주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강한 세력을 지니며 조선과의 통교무역에 노력해 다양하던 대마의 통교무역권을 종씨 일족의 손에 넣는 데 성공하였다. 의지가 도주에 오른 후에는 보좌역으로 도내 통치를 행하였다.

1587년 풍신수길의 구주 정벌 시에 가독으로 복귀하여, 다시 종가의 당주가 되었다. 의조는 의지와 함께 직접 풍신수길의 진영에 출두하여 종순의 뜻을 밝혔고 수길로부터 대마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때 수길은 의조 부자에게 조선 왕이 수길에게 직접 와서 신종(臣從)하도록 조선과 교섭할 것을 명하였다. 수길은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의조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 회피라는 목적과 수길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복잡한 사정 하에서 가신 귤강광(橘康廣)·현소(玄蘇)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과 교섭하며 조선과 수길 사이의 절충안을 모색하였다. 교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588년 12월 의조는 병사하고 다시 종의지가 당주가 되어 그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종의지는 1553년부터 사망 시인 1588년까지 대마도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단 1회뿐으로 그것도 그가 사망한 뒤인 1592년(선조 25)의 기사에서였다(『선조실록』 25년 10월 19일). 대신 종의지는 조선 측과의 통교 시 종씨 15대 당주로 이미 1526년 사망한 ‘종성장(宗盛長)’의 명의를 사용하고 있다. 종성장의 명의를 사용하여 조선 측과 통교하던 것은 그 전대부터 계속되던 일로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종성장이 대마도를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였다(『선조수정실록』 21년 12월 1일).

또한 종성장 내지 종의조와 그 아들인 종의지의 관계를 비롯한 당시 대마도의 사정에 대해서도 조선에서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일반화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수길이 대마도주 및 종씨를 멸족시키고 평의지를 대신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었는데(『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이러한 잘못된 정보는 유성룡의 『징비록』 등에도 그대로 사실인 것처럼 기록되게 되었다.

후에 안정복(安鼎福)이 『동사문답(東史問答)』에서 “서애(西厓) 같은 제공들이 평의지(平義智)가 종의조(宗義調)의 아들임을 몰랐고, 또 평수길(平秀吉)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변란을 대응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졸렬한 태도입니다.”라고 비판한 것처럼, 이와 같은 사실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뿐만 아니라 대마도와 관련된 조선에서의 정보 수집에는 많은 한계성이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日本歷史叢書), 吉川弘文館, 1995.
  • 荒木和憲, 『中世對馬宗氏領國と朝鮮』, 山川歷史モノグラフ, 山川出版社, 2007.
  • 촌정장개, 장원철, 「임진왜란의 역사적 전제: 일조관계사를 중심으로」, 『남명학연구』 7, 남명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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