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장(宗盛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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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대마도주로, 1520년에 도주가 된 인물.

개설

제13대 대마도주 종의성(宗義盛)이 1520년에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조카로서 14대 도주가 되었다. 조선과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그의 사후 명의를 도용한 사절이 조선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가계

제11대 도주 종정국(宗貞國)이 증조부이고, 할아버지는 제12대 도주 종재성(宗材盛)이며, 아버지는 종성가(宗盛家)이다. 제13대 대마도주 종의성이 작은할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종성장은 1478년(성종 9)에 종정국(宗貞國)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다(『성종실록』 9년 12월 7일). 이후 종의성의 뒤를 이어 도주가 되었다.

1522년(중종 17) 2월에 경오년(1509년)의 왜구인 종선순(宗盛順) 등 2인을(2명을) 잡아 보내오기도 하고(『중종실록』 17년 2월 13일), 1523년(중종 18) 1월 16일에는 피고시라(皮古時羅)를 보내기도 하는(『중종실록』 18년 1월 16일) 등 조선과 교류를 지속하였다. 특히 1524년(중종 19) 1월 2일에는 삼보라(三甫羅)를 보내 방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는 박다(博多)로 표류한 조선인을 송환하는 등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였다. 이는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년) 이후 교역을 중단한 조선의 경계심을 풀어 환심을 사려던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종성장의 기대와 다르게 조선에서는 그를 숙부를 죽인 패륜아로 치부하여 삼포왜란 이후 경색된 조선과의 관계를 타개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마침내 1526년에 대마도의 수호대(守護代) 등 자신의 부하들과 대립한 결과, 종성현(宗盛賢)의 반란 당시 자결하였다. 이후 방계인 풍기군주가(豊岐郡主家) 출신의 종장성(宗將盛)이 본가를 계승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1526년에 종성장이 죽은 뒤에도 도주의 조선 사절은 ‘성장(盛長)’의 명의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533년 피고사야문(皮古沙也文)의 조회(『중종실록』 28년 1월 26일)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례가 있다. 1540년에는 종성장 명의로 서계를 올리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5년 10월 23일). 이는 종성장 사후 계속된 1528년 종성치(宗盛治)의 난, 1539년 종청강(宗晴康)의 도주 추대 등 도주 권력의 불안정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종청강에 이르러서 도주의 권력이 안정되어 1552년에 적자인 종의조(宗義調)에게 가독(家督)을 양도하였다. 이후 1564년(명종 19) 8월 25일에서야 ‘구도주’ 종성장의 죽음을 조선에 알렸고, 그에 따라 ‘신도주’ 종의조 명의의 도서(圖書)로 교체되었다. 따라서 이 사이에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보낸 사절은 ‘종성장’의 명의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 손승철 등 저, 『한일 교류와 상극의 역사』, 경인문화사, 2010.
  • 佐伯弘次[사에키 코지] 저, 손승철·김강일 역, 『조선 전기 한일관계와 박다(博多)·대마(對馬)』, 경인문화사, 2010.
  • 荒木和憲, 『中世対馬宗氏領国と朝鮮』, 山川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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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우봉, 「조선 전기 부산과 대마도의 관계」, 『역사와경계』 74, 부산경남사학회, 2010.
  • 金光哲, 「對馬の僞使·日本國王使」, 『東アジア硏究』 33, 大阪經濟法科大,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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