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朝鮮輕便鐵道株式會社)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 |
한글표제 |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 |
한자표제 | 朝鮮輕便鐵道株式會社 |
상위어 | 사설철도 |
하위어 | 금강산전기철도(金剛山電氣鐵道), 남조선철도(南朝鮮鐵道), 서선식산철도(西鮮殖産鐵道), 양강척림철도(兩江拓林鐵道), 조선경남철도(朝鮮京南鐵道), 조선산업철도(朝鮮産業鐵道), 조선삼림철도(朝鮮森林鐵道), 조선흥업철도(朝鮮興業鐵道) |
동의어 |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朝鮮中央鐵道株式會社) |
관련어 |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오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조선경편철도령(朝鮮輕便鐵道令), 조선사설철도령(朝鮮私設鐵道令), 한상룡(韓相龍) |
분야 | 경제/산업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왕대 | 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朝鮮輕便鐵道株式會社)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2일 |
1912년 6월 제정·공포된 ‘조선경편철도령’에 의해 1916년 4월 설립된 최초의 사설철도.
개설
1912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가 ‘조선경편철도령(朝鮮輕便鐵道令)’을 제정·공포하자, 이에 입각하여 1916년 4월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서선식산철도(西鮮殖産鐵道) 등 8개 사설철도회사가 설립되는 성황을 보였다. 조선경편철도는 조선사설철도령의 공포를 앞두고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1919년 11월 자본금을 300만 원에서 1,200만 원으로 증자했다. 1920년부터 시작된 장기 불황으로 사설철도회사들의 영업이 악화되면서 조선흥업철도가 해산하는 등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한계 상황에 빠지는 회사들이 속출했다. 이에 서선식산철도 등 5개사를 조선중앙철도에 합병시키는 형태도 사철합동이 이루어졌다. 1923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총독부는 국유철도와 함께 사설철도의 부설을 조장하고자 1912년 6월 15일 ‘조선경편철도령’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그리고 사설철도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1914년부터 사설철도보조비를 총독부 예산에 계상하였다. 이에 따라 1914년 5월에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 설립발기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임명된 발기인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오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 오노 긴록쿠[小野金六], 고 세노스케[鄕誠之助], 나카노 다케나카[中野武營] 등 일본 재계의 유력인사들과 한상룡(韓相龍) 등 일부 한국인이었다. 이들 발기인의 주요 임무는 6만 주에 달하는 주식 모집에 있었다.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는 1916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고, 그해 4월 29일에 창립총회를 갖고 설립되었다. 자본금 300만 원으로 주당 50원, 총 6만 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6만 주 중 1만 3,120주는 발기인이, 4,200주는 찬성인이 인수했다. 5,000주는 일본의 규슈[九州]와 야마구치현[山口縣] 쪽에서, 3만 주는 도쿄[東京], 6,000주는 교토[京都]·오사카[大阪] 지역과 나고야[名古屋]에서 모집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000주는 한국에서 모집했다. 이때 이왕직에서도 구황실 기본 재산의 현금을 이용하여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의 주식을 인수하였고, 1917년 5월 2일에도 동사의 주식 1,000주를 추가로 매입했다. 매입가는 주당 11원에 총 1만 1,000원이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2일). 조선경편철도의 본점은 당초 부산에 두었으나, 그 예정선인 대구(大邱)-하양(河陽) 간 건설공사가 진척되면서 1917년 본점을 대구로 이전했다.
조직 및 역할
1917년 11월에 대구-하동(河東) 간 14마일 3/8인치의 공사가 완성되어 영업을 개시했고, 이어 1918년 5월 하양금호(琴湖) 간 24마일 1/8인치, 1918년 10월 서악(西岳)-불국사(佛國寺) 간 8마일 3/8인치 및 서악-포항(浦項) 간 22마일 1/8인치, 1919년 6월 포항-학산(鶴山) 간 1마일 2/8인치를 모두 준공 개업했다. 1921년 당시 총 영업마일이 73마일 4/8인치에 달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조선 유일의 사설철도회사였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를 배경으로 1919년 일본의 유력자본가들이 한국에 있어서 철도건설사업의 유망함을 전망하고 한국 각지에서 사설철도회사를 설립했다. 자본금 1,000만 원인 서선식산철도(西鮮殖産鐵道), 500만 원인 금강산전기철도(金剛山電氣鐵道), 1,000만 원인 남조선철도(南朝鮮鐵道), 1000만 원인 조선경남철도(朝鮮京南鐵道), 2,000만 원인 조선산업철도(朝鮮産業鐵道), 2,000만 원인 조선삼림철도(朝鮮森林鐵道), 1,500만 원인 양강척림철도(兩江拓林鐵道) 그리고 합병 전 해산된 조선흥업철도(朝鮮興業鐵道) 등 총 8사가 설립되어 공칭자본금 총 1억 원을 돌파하는 성황을 보였다. 사설철도회사의 난립으로 인한 영업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는 1920년 6월 18일, 조선사설철도령(朝鮮私設鐵道令)의 공포를 앞두고, 1919년 9월 30일 명칭을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朝鮮中央鐵道株式會社)로 개칭하였다. 업무 확장에 따라 1919년 11월 자본금을 1,200만 원으로 증자했다. 1921년 10월 불국사-울산 간 18마일 7/8인치를 개업했고, 1921년 11월 조치원-청주 간 14마일 1/8인치를 개업했다. 1923년 5월에는 청주-청안(淸安) 간 약 15마일을 개통하는 등 영업마일 약 120마일에 달하는 조선 최대의 사설철도회사가 되었다.
변천
그러나 1920년부터 시작된 장기 불황으로 인해 사설철도회사들의 영업이 악화되었다. 1921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 있던 사설철도회사의 합동 문제는 재계 불황을 배경으로 이전부터 식자층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조선흥업철도회사와 같이 해산하는 회사도 나오고, 다른 12개 철도회사(사설철도 9사 포함) 또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빠져 있었다. 1923년 들어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사설철도회사의 대합동을 계획하고, 금강산전기철도, 조선경남철도, 이미 해산한 조선흥업철도 3사를 제외하고 서선식산철도, 남조선철도, 조선산업철도, 조선삼림철도, 양강척림철도 5개사를 조선중앙철도에 합병하기로 했다. 사철합동을 위한 자금은 총독부와 협의하여 조선은행이 보증하는 형태로 채권 발행이 이루어졌다. 교섭 결과 1923년 9월 1일에 합동이 성립하였고, 동시에 회사명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를 조선철도주식회사로 개칭했다. 대구에 있던 조선중앙철도의 본점은 서울로 이전했다.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관보』 1916년 2월 24일자; 1916년 3월 1일자; 1917년 6월 20일자; 1917년 8월 23일자; 1917년 12월 28일자; 1918년 7월 22일자; 1918년 11월 4일자; 1919년 1월 9일자; 1919년 1월 18일자; 1919년 7월 4일; 1919년 9월 13일자; 1919년 9월 18일자; 1919년 9월 20일자; 1919년 10월 6일자; 1920년 6월 18일자
- 金明洙, 「近代日本の朝鮮支配と朝鮮人企業家・朝鮮財界─韓相龍の企業活動と朝鮮実業倶楽部を中心に─」, 慶應義塾大學大學院 經濟學硏究科 博士論文, 2010.
- 中村資良(編), 『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판, 東洋經濟時報社.
- 中村資良(編), 『朝鮮銀行會社要錄』 1927년판, 東洋經濟時報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