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현(定山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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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산현 |
한글표제 | 정산현 |
한자표제 | 定山縣 |
상위어 | 충청도(忠凊道) |
동의어 | 열기(悅己), 두릉윤성(豆陵尹城), 열성(悅城) |
관련어 | 계봉산성(鷄鳳山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산현(定山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정산현(定山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15세기에 호수가 258호, 인구가 1,113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3명, 진군(鎭軍) 5명, 선군(船軍) 124명이었다. 토지는 2,277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 정도였다. 1914년에 청양군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산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으로 열이현(悅已縣)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열성현(悅城縣)으로 고쳐서 부여군(扶餘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공주(公州)의 속현으로 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의 지방제도 개혁 때 현감으로 고쳤다.
백제는 사비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방어 거점을 두었는데, 정산현은 북부 방어를 위한 지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백제가 쌓은 성이 계봉산성(鷄鳳山城)이다. 작은 지역이고 조선에서는 군사적 비중이 약화되었지만, 홍성과 부여를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하였으므로 현으로 삼았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훈도를 두었으나 조선후기에 폐지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현으로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홍주부 관할의 정산군으로 승격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광무양안(光武量案)에 의하면 당시 정산군에는 9개 면이 있었으며, 호수는 3,182호, 토지는 1,721결이었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양군에 합병되어 정산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