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주(接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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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무렵 처음 제정된 초기 동학교단의 접(接) 조직을 이끄는 리더.

개설

동학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동학교도들 간에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되자 그 인맥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접(接)이 생기게 되었다. 접의 규모는 보통 30~50호 정도인데,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필요해져 접주(接主)를 임명하게 되었다. 접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복수의 접이 생김에 따라 그 상위 조직으로 포(包)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포의 리더를 대접주(大接主)라고 불렀다.

내용 및 특징

원래 ‘접’이란 말은 ‘동아리’라는 의미이므로, ‘접주’는 ‘동아리의 장’에 해당한다. 접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지역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인맥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접의 명칭도 그 구성원이나 접주의 거처를 중심으로 붙여졌다. 가령 ‘영해접’이니 ‘부중접’이니 하는 말은 영해나 부중을 중심으로 접이 조직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지역에 접주가 살거나 상대적으로 접원들이 많이 거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접주가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지 1년 뒤인 1863년 무렵이라고 한다. 동학 최초의 역사서인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1863년 2월 17일에 최제우가 포항에 있는 손봉조의 집에서 최초로 접주 16명을 임명했다고 한다. 동학의 접주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전봉준과 김구를 들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인 전봉준은 고부접주로 알려져 있으며, 백범김구 역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동학에 입교하여 이듬해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동학도의 접주 김학여와 정원준을 붙잡아 처형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1894년 9월 27일에는 안성군의 동학도 두목 유구서와 접주 김학여, 진천의 동학도 김금룡 등 세 명을 체포하여 많은 백성을 모아 놓고 처형하였다(『고종실록』 31년 9월 30일). 11월 15일에는 대관(隊官) 이겸제가 일본 군사와 함께 옥천 지방을 정탐하다가 비적의 접주 정원준을 붙잡아 쏘아 죽이고, 탄환 20두, 총 150자루, 환도(環刀) 100개, 그리고 철창과 죽창 600개를 노획하였다고 한다(『고종실록』 31년 11월 15일).

변천

접 조직이 점점 커지고, 복수의 접이 생김에 따라 그것의 상위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생긴 것이 ‘포’이다. 가령 처음에 50호 내외였던 접이 점점 늘어나서 100호 정도가 되면 두 접으로 분리되고 접주도 두 명이 된다. 이런 식으로 점점 늘어난 접들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최초의 접주와 인맥을 형성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이루는데, 이때 최초의 접주를 ‘큰접주’ 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

포에 관한 기록은 1884년부터 보이는데, 『시천교종역사』나 『시천교역사』에 의하면, 1884년의 최제우 탄신 기념제 때 각 포의 중간급 리더 82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893년 이후부터는 포가 완전히 동학의 단위 조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접주제 외에 육임제가 만들어졌다. 육임은 ‘여섯 명의 리더’라는 의미로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임은 접에는 두지 않고 대도소(大都所)와 각 포의 도소(都所)에만 두었는데, 그 역할은 주로 자문하는 일이었다.

참고문헌

  • 표영삼, 「접·포 조직과 남·북접의 실상」, 『한국학논집』25, 1994.
  • 표영삼, 「접포 조직과 남북접」, 『동학연구』4,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