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곶교(箭串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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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흥인문 외부인 동교의 살곶이장으로 흐르던 청계천의 지천에 놓은 다리.

개설

전곶교(箭串橋)가 놓인 살곶이터는 왕들이 매 사냥을 하거나 종실 및 대신들과 잔치를 벌이거나 군사 훈련을 하던 왕실의 의례 장소였다(『태종실록』 15년 4월 1일) (『단종실록』 2년 4월 2일) (『세조실록』 12년 2월 29일). 또한 왕이 낙천정(樂天亭) 등에 행행할 때 물이 깊으면 배로 건너던 곳이다(『세종실록』 1년 7월 4일). 특히 사냥을 즐기던 정종, 태종, 세종에 의해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왕들은 사냥이나 여흥 외에도 군사 훈련을 하면서 화포(火砲)를 방포하기도 했다(『세종실록』 2년 윤1월 16일). 이런 배경으로 1420년(세종 2)에 태종이 유정현(柳廷顯)과 박자청(朴子靑)에게 돌다리 공사를 시켰다(『세종실록』 2년 5월 6일). 1454년(단종 2)에 살곶이다리를 수리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대에 다리를 완성한 것으로 여겨진다(『단종실록』 2년 3월 26일). 그런데 1475년(성종 6)에 강무(講武)시 교량 설치 여부를 논하면서 살곶이장[箭串場]의 내천이 깊으니 다리를 만들자고 한 내용이 있어(『성종실록』 6년 9월 2일), 단종대에 다리를 수리하다가 방치하였거나 그 후 파손되어 성종대에 다시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명칭 유래

다리가 세워지면서 지역 명칭을 붙여 사용하였다. 이곳을 흐르는 하천 인근의 명칭이 살곶[箭串]이었다(『태종실록』 12년 3월 4일). 살곶이다리라고도 한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권을 차지한 뒤 함흥에 칩거하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맞히지 않고 땅에 꽂혀,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는 의미에서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간혹 한자 이름 ‘전곶교(箭串橋)’를 전관교라고 읽는 경우도 있는데 옳지 않다. ‘串’의 음은 이곳에 화살이 꽂혔다고 하는 유래에 따라 붙여진 ‘곶’이다.

자연 환경

살곶이는 청계천이 동대문 아래에 있는 수구문을 지나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곳에 위치한다. 동대문 밖에서부터 시작하여 중랑천 천변 아래 뚝섬, 아차산 밑에 이르는 지역은 대부분 평지로 목초지를 조성하여 마장(馬場)이나 군사 훈련장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병조와 사복시의 말들을 이곳에서 사육하였다(『세종실록』 17년 8월 25일) (『단종실록』 1년 5월 21일).

형성 및 변천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에서 가장 길다. 조선초기에 만든 장판교(長板橋)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 16열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만들었다.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두었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작게 하는 마름모형이다.

1913년(순종 6)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하였으며, 1925년(순종 18)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파손되었다. 1938년에 성동교가 건설되면서 방치되었다.

위치 비정

오늘날 한양대학교 인근에 흐르는 중랑천에 있다.

관련 기록

1637년(인조 15)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뒤 이곳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인조실록』 15년 2월 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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