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묘(全溪大院君墓)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전계대원군묘 |
한글표제 | 전계대원군묘 |
한자표제 | 全溪大院君墓 |
관련어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최씨(崔氏),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은언군(恩彦君),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哲宗)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혜원 |
장소 |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神穴面) |
좌향(坐向) | 해좌사향(亥坐巳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전계대원군묘(全溪大院君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철종실록』 즉위년 6월 14일, 『철종실록』 즉위년 6월 17일, 『철종실록』 7년 3월 26일 |
조선 제25대 왕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광(李壙)의 묘.
개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잘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 은언군(恩彦君)의 5남이다. 은언군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1785년(정조 9) 3월 21일에 태어났다. 1841년(헌종 7) 11월 1일에 57세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은언군의 묘 아래에 묻혔다.
1849년(철종 즉위)에 3남인 덕완군(德完君)이 헌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에 따라 왕의 사친으로서 대원군의 봉작을 받았고(『철종실록』 즉위년 6월 14일)(『철종실록』 즉위년 6월 17일), 묘소 또한 정비되었다. 나중에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으로 천장되었다. 1986년에 포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철종은 즉위 후 전계대원군과 그 정실인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최씨(崔氏), 그리고 계실이자 자신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묘의 봉분을 고쳐 쌓았다. 묘소의 석물은 강화에서 돌을 떠 와서 만든 뒤 추가하였다. 묘의 경계는 덕흥대원군묘의 예에 따라 사방 300보로 정했다. 묘소의 동쪽은 신혈현(神穴峴) 아래, 서쪽은 도당현(都堂峴), 남쪽은 삼천동(三川洞), 북쪽은 모절리(毛節里)까지를 경계로 정하고, 경계 안에 있는 백성의 묘는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1855년(철종 6) 8월에는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수릉(綏陵)을 동구릉 내로 천릉하면서, 더불어 전계대원군의 묘소도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10월에 포천 해룡산(海龍山) 선단리(仙壇里) 지역을 살펴본 뒤 이듬해에 천장하였다(『철종실록』 7년 3월 26일).
새로 조성한 묘의 경계는 이전의 묘보다 훨씬 넓었다. 동서로는 구룡동에서 해룡천까지 600보, 남북으로는 선단산(仙壇山)에서 응봉(鷹峯)까지 600보로, 사방 2400보에 이르렀다. 묘를 조성하면서 경계 내의 민가는 모두 철거하고, 민묘(民墓)도 이장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왕의 집안사람 중 왕자군에 해당하는 1품일 경우, 묘의 경계를 사방 100보 이내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전계대원군묘는 왕의 아버지로서의 격을 보이기 위해 매우 큰 규모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성 상황
전계대원군과 정부인인 최씨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왼쪽 앞에는 묘갈(墓碣)이 있는데, 김좌근(金左根)이 짓고 김문근(金汶根)이 쓴 것으로 1856년(철종 7) 천장할 때에 세웠다. 상계에는 봉분에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 주변은 곡장으로 둘렀다. 하계에는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망주석과 무석인을 1쌍씩 배치하였다. 무인석은 천장할 때 추가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일반 사대부의 묘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왕릉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이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대원군으로 추봉되었을 때, 양주에 세운 것을 1951년에 옮겨 온 것이다. 비문은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관련 사항
철종의 생모인 염씨의 묘는 전계대원군묘의 동쪽에 있으며, 묘표는 1862년(철종 13)에 세웠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심암유고(心庵遺稿)』
- 경기도박물관, 『경기묘제석조미술』, 경기도박물관, 2008
- 윤국일 옮김, 『신편 경국대전』, 신서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