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겸익(錢謙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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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의 관리이자 시인이며 학자로, 동림당의 지도자.

개설

전겸익은 명 조정에 비판적이었던 동림당(東林黨)의 일원이었다. 청조에 항복하여 청조의 비서원 학사, 예부(禮部) 시랑(侍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반청(反淸)운동에 가담하여 투옥과 사면을 반복하였다. 명대 전후 7자(前後七子)의 의고적(擬古的) 주장에 반대하며 문학에서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 공안(公安)·경릉파(竟陵派)의 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조선의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의 건륭제는 전겸익이 명조와 청조 두 왕조에서 입신하고 청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들을 금서 조치하였다.

활동 사항

전겸익은 명 말인 1610년 과거에 급제한 뒤 편수(編修)와 첨사(詹事), 예부시랑을 지냈다. 그는 명나라 조정에 비판적이었던 동림당에 속하여 크게 출세하지 못하고 귀향하여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1645년에 청의 군대가 강남(江南)을 공격하자 항복하고, 이듬해 청조의 비서원 학사와 예부 시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5개월 간 재임한 후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647년 구식사(瞿式耜)와 정성공(鄭成功)의 반청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사면을 받고 낙향하여 명대(明代) 문헌 및 사료를 정리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청조의 예부 우시랑에 임명되어 『명사(明史)』를 편집하였다.

청의 건륭제는 전겸익이 두 왕조에서 관직을 받은 변절자라는 이유로 『이신전(貳臣傳)』에 편입시키고, 그의 저작은 여러 차례 금서(禁書) 조치를 받았다(『정조실록』 9년 4월 19일). 조선 지식인들 중에도 전겸익이 명조를 배신하고 청조에 입신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문학과 사상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664년 5월 24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전겸익은 당시의 문학과 사상의 쇠퇴가 명조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명대 문단의 중심이었던 전후 7자의 의고적인 주장에 반대하며 문학에서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의고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의고파를 비판할 논리를 제공하였다. 전겸익은 공안·경릉파의 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전겸익이 1652년 간행한 『열조시집(列朝詩集)』은 조선에도 널리 알려져 조선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술 및 작품

『초학집(初學集)』·『유학집(有學集)』·『국초군웅사략(國初群雄史略)』·『열조시집(列朝詩集)』·『투필집(投笔集)』

묘소

강소성(江蘇省) 우산(虞山) 남록(南麓).

참고문헌

  • 박경란, 「명말청초 시대와 전겸익의 문학 주장」, 『중국어문학논집』 20, 2002.
  • 박경란, 「전겸익의 문학 근본론」, 『중국어문학논집』 제14호, 2000.
  • 강정만, 「전겸익 문학론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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