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전(藉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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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왕이 몸소 농사를 짓던 토지.

개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이 농경을 권장하기 위해 직접 밭을 갈던 일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조 초기부터 적전을 두었으며, 선농제의 치제(致祭)와 함께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을 제도화하였다. 성종 때 친경이 처음 이루어진 뒤 대한제국 때까지 왕들의 친경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적전은 친경을 통해 농업을 장려하고 그 수확으로 제수(祭需)를 충당하는, 농업을 근간으로 한 유교 국가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토지라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적전은 두 군데로 양주에 동적전(東籍田)을, 개성에 서적전(西籍田)을 두었다. 『태종실록』에는 두 적전을 합한 넓이가 400여 결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적전이 동적전에 비해 두 배 정도 넓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서적전의 소출이 5080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적전에서 재배한 곡식들은 각종 국가 제사에 제수로 사용되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적전에서 경작하는 곡식의 종류는 아홉 가지였다.

적전은 이념적으로 왕이 친경을 행하는 토지였으나, 실제 경작은 관노비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종대에 이르러 적전을 경작하는 노비가 도망하는 것이 문제가 되자, 적전 부근 양주(楊州) 및 풍덕(豊德)의 백성[民]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그 백성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수록되어, 적전 부근의 거주민들 중 민전 10결당 1명을 차출하여 3명이 적전 1결을 경작하도록 하고 그들에게는 공부(貢賦) 외의 잡역을 면제해 주게 하였다. 중종대 이후에는 자성(粢盛)을 충당할 만큼의 땅만 백성을 동원하여 경작하였고, 그 외의 토지는 병작반수(竝作半收)를 통해 운영하였다.

적전에서 왕이 친경하는 의식은 농업의 신 선농(先農)에 대한 제사인 선농제와 함께 이루어졌다. 따라서 선농제와 친경을 함께 묶어 선농제 혹은 적전제라 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적전제, 조선시대에는 선농제라 불렀다. 『경국대전』에는 친경의 시기를 경칩(驚蟄) 뒤의 길한 해일(亥日)로 택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경국대전』이 성립되기 전에는 해일이 아닌 길일에 친경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475년(성종 6)에 이르러서야 왕의 친경이 이루어졌다. 친경 이후에는 별시를 통해 관원을 뽑기도 하였으며, 사면령을 내리는 등 은혜를 베푸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변천

적전 제도는 『경국대전』이 반포될 때까지 정비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숙종대에는 전주(全州)진전(陳田)에 적전을 설치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영조대에는 적전의 경작 방식을 정전법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즉 적전의 땅을 9등분한 뒤 8/9은 사전(私田)으로, 1/9은 공전(公田)으로 설정하여 세금을 거두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적전의 경작 규정은 『속대전(續大典)』에 기재되었다. 한편, 조선후기로 갈수록 적전에서 수확되는 곡식의 양이 줄어들어 제수를 충당하기 어렵게 되자, 영조대에는 호조(戶曹)를 통해 부족한 자성을 조달하기도 하였고, 정조대에는 호남에서 제수용 곡식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적전에 나아가 친경하는 예는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순종은 1909년(융희 3) 7월에 직접 동적전에 나아가 보리 베는 의식을 행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박정자, 「이조초기의 적전고」, 『숙대사론』5,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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