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간관(赤間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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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산구현(山口縣) 하관(下關)의 옛 이름.

개설

일본 본주(本州)의 서쪽 끝부분에 있으며, 관문(關門)해협을 사이에 두고 구주(九州)와 마주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에서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한 사자(使者)인 통신사가 강호(江戶)까지 왕래할 때 통신사를 접대하였던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명칭 유래

추번(萩藩) 모리씨(毛利氏)의 영지인 주방(周防)과 장문(長門) 두 개의 국(國) 중에서 주방국 웅모군(熊毛郡) 조호관(竈戶關)을 상관(上關)이라고 하고, 장문국 풍포군(豊浦郡) 적간관을 하관(下關)이라고 불렀다.

자연 환경

현재 하관시(下関市) 남부에 위치하며 화산(火山)의 남서 방향에 해당한다. 북쪽은 약간 높은 구릉지가 동서로 접해 있고, 남동쪽은 관문해협에 면해 있다. 서쪽은 장기촌(長崎村)·풍전전(豊前田)과 접해 있다.

형성 및 변천

일본의 본주 최서단에 위치한 해륙교통의 요충지이다. 관문해협을 끼고 있어 원시시대부터 한반도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인 해상의 길목이었다. 겸창(鎌倉)시대에는 왜구를 단속하기 위하여 장문탐제(長門探題)가 설치되었다. 실정(室町)시대에는 대내씨(大內氏)가 중국을 상대로 한 감합선(勘合船)무역을 하는 항구로서 번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70년(성종 1)부터 1476년(성종 7)까지 적간관이 조선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성종실록』 1년 10월 8일)(『성종실록』 7년 11월 29일).

강호(江戶)시대에는 제추사(諸酋使)로 불리던 중소 해상영주들이 조선과 무역을 하는 거점이 되어 번성을 누렸다. 또한 내해(内海)의 여러 항로가 모여 장기(長崎)와 함께 서쪽의 대판(大阪)으로 불리었다. 강호막부(江戶幕府) 말기에는 장주번(長州藩)과 외국함대의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1871년에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풍포현과 청말현(清末縣) 두 현의 구역으로 나뉘었지만, 같은 해 11월 산구현(山口縣)으로 통합되어 적간관구(赤間關區)가 되었고, 1889년 4월 1일 시제(市制)와 정촌제(町村制)의 시행으로 적간관시(赤間關市)가 되었다. 1902년 6월 1일 하관시(下關市)로 개칭되었다. 개칭 이유는 적간관보다 하관이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위치 비정

하관시(下関市) 중지정(中之町), 당호정(唐戸町), 갑지정(岬之町)과 미모스소천정[みもすそ川町], 단지포정(壇之浦町), 아미타사정(阿弥陀寺町), 궁전정(宮田町) 일정목(一丁目), 적간정(赤間町), 전중정(田中町), 남부정(南部町), 관음기정(觀音崎町), 입강정(入江町), 세공정(細江町) 일정목(一丁目)의 일부

참고문헌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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