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군(載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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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중앙에 있으며 북쪽으로 봉산, 동쪽으로 평산, 남쪽으로 해주, 서쪽으로 안악, 신천과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재령군(載寧郡)은 황해도 초입의 봉산에서 남쪽의 해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읍이다. 경내의 장수산성(長水山城)은 유사시 재령뿐 아니라 신천, 배천의 주민들도 피난하는 곳이었다. 1217년(고려 고종 4)에 현으로 독립하였고, 1415년(태종 15)에 군이 되었으며, 1635년(인조 13)부터 군수가 장수산성수성장을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으며 식성군(息城郡)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되었고, 907년(신라 효공왕 11)에 안주(安州)로 바뀌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진으로 개편되어 방어사가 설치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안서도호부의 속읍이 되었다. 1106년(고려 예종 1)부터 감무가 부임하였고, 1217년에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 낸 공이 있다 하여 재령현으로 승격되었으며 현령이 따로 임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394년(태조 3)에 경기우도에 속하였으나(『태조실록』 3년 6월 23일), 곧 풍해도로 이속되었다. 1396년(태조 5)에 풍주(豐州)에 속했던 삼지현(三支縣)을 합속하여 영역이 확대되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8일). 1415년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1519년(중종 14)에 경내의 장수산성에 있던 읍치를 이전하였다(『중종실록』 14년 3월 24일).

조직 및 역할

종4품 군수가 보임되었으며, 시위군 173명, 진군 169명, 선군 200명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40명, 아전 33명, 지인 19명, 훈도 10명, 사령 28명, 관노 16명, 관비 7명이 있었다. 1635년에 후금의 재침에 대비하여 재령군수가 장수산성수성장을 겸하게 되었으며 별장 1명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장수산성은 재령, 신천, 배천 주민들의 유사시 피난처로 설정된 곳이었다.

변천

재령은 봉산에서 해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1455년(세조 1)에 전국에 진관 체제를 시행하면서 각 도의 내지에 거진(巨鎭)과 제진(諸鎭)을 설치하였을 때 황해도 해주도(海州道)의 중익이 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하였을 때 해주부 재령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13도제를 시행하자 황해도 재령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재령군(載寧郡)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