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부(長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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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함경도 장진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장진부(長津府)는 1787년(정조 11)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관제 개혁에 따라 장진군(長津郡)으로 바뀔 때까지 함경도 장진 지방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조선후기 북방 개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신라 진흥왕 때에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때에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해 있었다.

고려 건국 후 안변(安邊)·영흥(永興)·함주(咸州) 방면을 영토로 편입하였고, 973년(고려 광종 24)에 장평진(長平鎭)·박평진(博平鎭)·고주(高州) 등지에 성을 쌓아 방어에 대비하였으므로, 당시 장진 지방도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107년(고려 예종 2) 윤관(尹瓘)이 9개의 성(城)을 쌓았다가 2년 뒤 반환하면서 이 지역은 여진(女眞)의 영역이 되었다. 금(金)나라가 쇠망하면서 이 지역은 고려에 편입되어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에 속하였지만, 다시 원(元)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편입되었다. 공민왕 때에 쌍성총관부를 혁파하며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갑주(甲州)가 설치되면서 그 관할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 갑주는 갑산군(甲山郡)으로 개편되었고(『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1446년(세종 28) 갑산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면서 삼수(三水)가 독립하여 군(郡)이 되었다(『세종실록』 28년 4월 11일) (『세종실록』 28년 5월 1일). 이때 장진은 삼수에 속한 지역이었다. 1665년(현종 6) 함경감사민정중(閔鼎重)이 장계로 청한 바에 따라 장진강(長津江)에 장진책별장(長津柵別將)을 두도록 하였고, 1685년(숙종 11) 장진강 가에 어면진(魚面鎭)을 설치하여 후주(厚州)의 군사와 백성을 소속시켰다(『현종실록』 6년 6월 22일). 정조대에 들어 장진에 읍을 설치하는 논의가 본격화되어 1785년(정조 9)에 우선 첨사진(僉使鎭)을 설치하도록 하고 장진책별장을 승격시켜 장진진첨사(長津鎭僉使)로 삼았다(『정조실록』 9년 12월 6일). 이듬해에는 함경감사정민시(鄭民始)의 청에 따라 두 곳의 파발 역참을 설치하였고(『정조실록』 10년 윤7월 5일), 다시 1787년(정조 11) 정민시의 장계에 따라 장진진을 장진부로 승격시켰다(『정조실록』 11년 7월 4일) (『정조실록』 11년 8월 3일).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都護府使) 즉 부사(府使)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종3품으로 규정되어 있다. 『헌종실록(憲宗實錄)』에 따르면 무관 당상관으로 임명하다가, 1841년(헌종 7)에 당하관의 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변천

1815년(순조 15)에는 독진(獨鎭)으로 남아 있던 별해진(別害鎭)으로 장진부를 이설하고, 삼수의 이숙령(李淑嶺) 서쪽을 장진에 붙이도록 하였다(『순조실록』 15년 5월 5일) (『순조실록』 15년 8월 19일). 1843년(헌종 9)에는 백성들이 흩어진다는 이유로 장진부를 다시 장진진으로 강등했다가(『헌종실록』 9년 8월 2일), 1859년(철종 10)에 다시 장진부로 회복시켰다(『철종실록』 10년 5월 19일). 1895년(고종 32) 삼수에 편입시켰다(『고종실록』 32년 2월 5일). 같은 해 지방관제를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꿀 때 강계부(江界府) 소속의 장진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