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도(獐子島)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장자도 |
한글표제 | 장자도 |
한자표제 | 獐子島 |
동의어 | 신도(薪島) |
관련어 | 비단섬, 신도첨사(薪島僉使), 용천부(龍川府)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지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박정민 |
이칭 | 비단섬, 신도(薪島) |
관할 지역 | 평안북도 신도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자도(獐子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 4년 3월 25일, 『순조실록』 7년 11월 26일, 『순조실록』 8년 1월 4일, 『순조실록』 3년 9월 2일, 『중종실록』 23년 8월 24일, 『순조실록』 3년 9월 2일 |
조선시대 평안도 용천부에 속한 섬.
개설
장자도는 장도(獐島) 혹은 신도(薪島)라고도 한다. 이곳은 압록강 하류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왕래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순조대에 진(鎭)을 설치하였다가 고종대에 혁파하였다.
자연 환경
평안북도 신도군 신도면에 속하는 섬으로, 현재 북한에서는 비단섬이라고 부른다. 과거 육지가 침수되어 이루어진 섬이며, 근래에 와서 압록강의 토사 운반과 퇴적 작용으로 넓은 갯벌이 형성되고 있다. 곶들이 돌출해 있고 서쪽과 남쪽에는 산지가 바다에 접하고 있어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형성 및 변천
장자도는 조선전기부터 용천에 속한 섬으로,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특수성이 있다. 명과 청나라 사람들이 자주 도망 나와서 살거나, 고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특히, 1803년에 청의 고려구(高麗溝) 일대에서 대규모로 벌목했던 유문희(劉文喜) 등 6명이 장자도로 도망쳐 온 사건이 발생하였다. 청은 장자도에 군사를 보내 이들을 나포하였고, 조선에서 이곳을 관리하라고 하였다(『순조실록』 4년 3월 25일).
이 때문에 조선은 본격적으로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는 내용에 대해 논의하였다. 1807년(순조 7) 9월에 조선은 청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겠다는 의향을 보였다. 결국, 같은 해 11월에 청으로부터 진을 설치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순조실록』 7년 11월 26일).
조선은 1808년에 신도첨사(薪島僉使)로 진을 삼고, 해서수영(海西水營)에서 관장하는 방선(防船) 1척과 추포선(追捕船)·협선(挾船) 각 5척을 획급(劃給)하기로 결정하였다(『순조실록』 8년 1월 4일). 장자도가 아닌 신도에 진을 설치한 사실에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하지만 1803년 9월에 의주부윤(義州府尹)서유구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 가운데 장자도는 곧 용천부(龍川府)의 신도(薪島)라고 한 것이 있다(『순조실록』 3년 9월 2일). 이를 통해 장자도의 다른 이름이 신도이고, 신도에 첨사진을 설치한 것은 장자도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28년(중종 23)에 평안도 경차관 임준의 계본(啓本)에 의하면, 장자도에 요동의 주민들이 48가구나 와서 살고 있었다(『중종실록』 23년 8월 24일). 이에 조선에서는 군사를 보내 모두 잡아 명에 돌려보냈다. 그 밖에도 청의 백성들이 도망쳐 이곳에 거주하거나 나무를 베어 가고, 조선인과 밀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1803년(순조 3)에도 청의 성경공부시랑(盛京工部侍郞)이 찰문(札文) 1도(度)를 의주부윤(義州府尹)에게 보내 요동에서 도망친 청의 백성이 장자도에 살고 있다며 이들을 나포할 것을 요청하였다(『순조실록』 3년 9월 2일). 당시 장자도에 조선인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동여도(東輿圖)』
- 『관서진지(關西鎭誌)』
- 『동여도(東輿圖)』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구범진, 「19세기 盛京 東邊外 山場의 管理와 朝·淸 公同會哨」, 『사림』32,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