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무소(葬儀事務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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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의사무소 |
한글표제 | 장의사무소 |
한자표제 | 葬儀事務所 |
관련어 | 고종(高宗), 국장(國葬), 덕수궁(德壽宮), 독살(毒殺), 만세운동(萬歲運動), 이태왕(李太王), 함녕전(咸寧殿), 훈련원(訓鍊院)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왕대 | 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의사무소(葬儀事務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12년 1월 27일 |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을 때 일본 정부가 국장 행정 사무를 집행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
개설
고종이 1919년 1월 승하한 이후 1921년 종묘에 부묘(祔廟)하면서 모든 국장의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당시는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감시하던 시기로 고종의 장례도 일본식으로 치렀다. 장의사무소는 이를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 한국 전례였던 도감 중심의 장례 방식이 아닌 일본식 전례에 따랐다. 덕수궁부터 훈련원에 마련된 장례식장까지의 발인도 일본식으로 거행되었지만, 훈련원에서 능침이 준비된 금곡까지는 조선식으로 발인이 진행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이 대거 운집한 거리에서 국장을 일본식으로 치러 자신들이 조선 황실을 장악했음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일본궁내성에서 내각(內閣) 및 조선총독과 논의하여 장의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고종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왕공족이었으며 메이지[明治]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에 장례식도 일본식이기는 하였으나 궁내성에서 관리하는 황족의 예에 따라 거행된 황실 장례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한제국 전래의 조선왕실 전통을 감안하지 않은 일본식 위주의 장례였다. 특히 고종 독살의 의문과 일본식으로 거행된 장례식 모습은 조선 민중의 분노를 확산시켜 3·1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1919년 1월 27일 일제는 고종의 장의사무소를 도쿄의 궁성 내 내각에 설치하고, 분실(分室)을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안에 마련하였다. 이들 두 기관이 서로 연락하여 관련 사무를 진행하도록 했다. 국장을 치르는 데 장의괘장(葬儀掛長)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차장(次長)과 식부차장(式部次長)에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와 중추원 부의장(副議長)이완용(李完用), 괘원(掛員)에 내각 서기관장(書記官長)다카하시 미쓰타케[高橋光威], 서기관(書記官)시모조 야스마로[下條康麿], 별부총태랑(別府總太郞)기노시타 미치오[木下道䧺], 척식국(拓殖局) 장관(長官)후루시타 겐조[古下廉造], 서기관이리에 카이헤이[入江海平]와 궁내 서기관오키 쓰네오[大木彛䧺], 사무관(事務官)센고쿠 마사요시[仙石政敬], 식부관(式部官)오카다 헤이타로[岡田平太郞], 장전(掌典) 사에키 아리요시[佐伯有義], 이왕직(李王職) 차관(次官)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이왕직 찬시(贊侍)윤덕영(尹德榮), 총독부 내무부(內務部) 장관(長官)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 총무국장오기타 에쓰조[荻田悅造], 비서관엔도 류사쿠[遠藤柳作]와 간다 준이치[神田純一], 사무관구도 쇼헤이[工藤壯平], 기사(技師)이와이 초사부로[岩井長三郞], 통역관(通譯官)후지나미 요시쓰라[藤波義貫], 육군(陸軍) 소장(少將)무라타 시노[村田信乃], 해군(海軍) 대좌(大佐)도조 아키쓰구[東條明次], 중추원 고문(顧問)조중응(趙重應), 경무총장고지마 소지로[兒島惣次郞], 송병준(宋秉畯)을 임명하고, 제관장(祭官長)에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제관부장(祭官部長)에 윤덕영(尹德榮) 등을 임명하였다(『순종실록부록』 12년 1월 27일).
참고문헌
- 『이태왕국장자료(李太王國葬資料)』
- 『매일신보(每日新報)』
- 장필구·정봉희, 「고종 장례 기간 신선원전의 조성과 덕수궁·창덕궁 궁역의 변화」, 『대한건축학회 논문집』29(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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