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資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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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이 당하관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품계인 정3품 하계.

개설

자궁은 품계를 의미하는 ‘자(資)’와 끝을 의미하는 ‘궁(窮)’이 만나서 이루어진 용어로, 과거(科擧)나 문음을 통해서 관직에 오른 이들이 일상적으로 오를 수 있는 참상관의 최상위의 관직이었다. 동반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서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 이에 해당하였다. 관료들은 이 위계까지는 고만(考滿)에 따라서 참하관은 450일, 참상관은 900일을 기준으로 정기적인 평가에 의해서 진급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오르는 것은 근무 일수에 따른 정례적인 진급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당하관이 당상관에 오르는 것은 왕과 대신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관료들은 정3품 하계인 자궁에 이르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당상관으로 승진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국가적인 큰 경사에 모든 관원에게 자급을 부여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경우에는 본인의 품계를 당상으로 올릴 수 없었으므로 자(子)·손(孫)·제(弟)·질(姪) 등이 대신 자급을 받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자궁에 오른 이들이 당상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궁에 머문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자궁인에 대한 언급이 대가(代加)제도의 시행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대가제의 시행은 세종 말기에 세자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여 모든 관료에게 관품을 부여한 것에서 비롯하였다(『세종실록』 31년 12월 3일). 그러나 이때에는 대가제의 규정이 미비하여서 당상관의 대가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자궁인은 대가하도록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자궁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은 단종대에 공신들에게 대가제를 시행하면서부터였다. 1454년(단종 2) 삼공신 적장자(三功臣嫡長子)들의 회맹연을 열고 그 자리에 참석한 자들에게 자급을 올려 주었다. 이 자리에서 자궁자를 별도로 거론하면서, 자궁자는 자궁이므로 당상관으로 올려 주지 않고 그 적장자에게 대가하도록 명하였다(『단종실록』 2년 3월 9일). 1456년(세조 2)에도 유사한 사례가 보이는데, 회맹연에 참여한 공신의 자손 모두에게 가자하면서 자궁자에게는 ‘서(壻)·제·질·손’ 중 1명에게 대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세조실록』 2년 11월 14일).

공신들에게 시행하던 대가제를 보여 주는 이 2가지의 예는 공신들의 적장자에게 한정한 것으로, 별다른 공로 없이 특정 집단의 모두에게 가자한 것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세종대에는 순자법이 강하게 시행되면서 관품을 올려 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단종·세조초 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공신의 회맹을 강조하고 자급을 올려 주게 되면서, 자궁인에 대한 처리 방안이 강구되었고 그중 자궁의 사례가 나타나고 있었다.

더 나아가 1457년에는 원구단에 제사한 후 세조는 경외의 문무백관들에게 각기 한 자급을 더하고, 천제 및 종묘의 춘향대제와 예고제(預告祭)에 제사 지낸 여러 집사들에게는 또 한 자급을 더하였다. 당상관 및 자궁인에게는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한 자급을 더하도록 하였다. 모든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한 자급을 올려 주면서 자궁인과 당상관에게는 본인의 자급을 올려 주는 대신 대가를 허용하였다. 이후 국가의 중요한 경사가 있을 때에는 일률적으로 자급을 올려 주는 사례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자궁인에 대한 규정이 언급되었다.

변천

자궁제가 만들어지면서 자궁인이 당상관이 되는 길도 정비되었다. 기본적으로 당상관이 되는 길은 매우 좁았을 뿐 아니라 왕과 대신들의 결정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성종대에 이르면 자궁인이 특정 부서의 관직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인다. 1470년(성종 1)의 기록을 보면 한명회 등은 과거에는 통례원·승문원·봉상시·사복시의 행수관은 근무 연한이 차면 승진하여 당상관을 제수하였다고 언급하면서 예전대로 하는 것이 어떠한지 건의하였다(『성종실록』 1년 3월 21일). 이는 통례원 등을 통한 당상관의 승진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당상관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방법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의해서 성종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는 당상에 승진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명하여 자궁인이 당상관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길이 열렸다.

이후 중종대에 이르면 몇몇 부서가 당상관이 될 수 있는 관직으로 추가되었다. 1518년(중종 13) 대간이 봉상시 정(奉常寺正)과 승문원 판교, 통례원 통례, 훈련원(訓鍊院) 정(正)은 임기가 차면 당상으로 올리는 것이 상례라고 언급한 것을 보아서 봉상시 정과 훈련원 정도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는 자리로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중종실록』13년 6월 3일).

이와 같은 제도적인 보완으로 자궁인이 당상관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길은 열려 있었으나, 그 길 역시 협소하여서 자궁인이 당상관이 되는 길은 여전히 좁았다.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지원이 없는 일반 관료의 경우,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자궁이었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최승희, 「조선시대 양반의 대가제(代加制)」, 『진단학보』 60,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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