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통신사(壬戌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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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숙종 8)년 조선에서 강호막부의 제5대 장군 덕천강길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행.

개설

덕천강길(德川綱吉)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임술통신사는 왜관의 재정비를 위하여 별도로 부과된 3가지 조건을 대마번과 교섭을 통하여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중 왜관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7가지 항목의 무오절목(戊午節目)은 1683년(숙종9)에 5개 항목으로 된 계해약조(癸亥約條)로 체결되었으며, 그 내용은 왜관 안에 패로 세워져 일본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절차 및 내용

1680년 5월 8일 4대 장군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사망하고 8월 23일 동생인 덕천강길(德川綱吉)이 5대 장군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681년 7월 대마번에서 사자를 파견하여 통신사 요청과 함께 마상재(馬上才)의 동행을 요구하였다. 동래부에서는 비변사에 장계를 올려 대마번에서 사자가 왔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일본에서 장군이 새로 취임하면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은 이미 항례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한 논쟁 없이 통신사 차출 준비를 지시하였다.

1681년 7월 대마번에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후 출발 직전까지 4개월 동안에 걸친 논의를 통하여 사행절목(使行節目)이 결정되었다. 통신사행의 최고 책임자인 삼사는 정사(正使)에 윤지완, 부사(副使)에 이언강, 종사관(從事官)에 박경후가 임명되었으며(『숙종실록』 8년 5월 8일), 일행은 모두 473명이었다.

임술통신사는 새로 취임한 장군 축하의 임무 외에도 별도의 임무와 목적도 있었다. 1682년 임술통신사가 파견될 당시 일본은 문치주의를 기조로 한 막번 체제의 안정기에 있었다. 한편 조선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조공책봉 체제를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과의 평화로운 관계는 국가 존립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러나 대마번으로부터 계속되는 무역 확대 요구는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임술통신사 파견을 통하여 새 정권의 정치적 성격 탐지와 대마번에 대한 규제와 감시 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동래부사남익훈의 장계에서 알 수 있듯이 임술통신사행은 크게 3가지 조건을 가지고 대마번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첫째, 초량왜관이 신축된 1678년(숙종 4) 9월에 동래부사이복이 제시한 7가지 약조를 새긴 패(牌)를 왜관 내에 세워 엄중히 규제하고 이를 범할 때는 즉시 처단할 것, 둘째, 대마번의 사자와 세견선을 감수할 것, 셋째, 조선으로 파견 나와 있는 일본 사신인 차왜(差倭)의 왜관에서의 체류 일수를 한정하고 거듭 보내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숙종실록』 8년 3월 5일).

대마도에서의 조·일 양국의 교섭은 1682년 10월 21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정사윤지완과 동행한 당상역관 박재흥·변승업·홍우재와 대마번의 중신들인 평성행(平眞幸)·귤진중(橘眞重)·평성창(平成昌)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10월 21일 등성시(藤成時)에게 규정 이외로 파견하는 사자인 별차왜(別差倭)의 파견을 금지하고, 왜관에서 무역을 담당하는 대관(代官)의 수를 규제하는 동시에 7가지 약조를 푯말에 세우도록 요구하였으나 반응이 없었다. 22일에 요구 조건 수락을 다시 재촉하였지만 등성시는 다만 통신사 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대답하겠다는 뜻을 비쳤을 뿐이었다.

결국 23일 통신사 일행이 사행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2명의 재판왜(裁判倭)에게 이전에 왜관에서 있었던 소란을 강호(江戶)에 통신사행이 도착하면 장군에게 폭로하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대마번 측은 동의하였다. 곧이어 삼사는 3가지 요구 사항을 적은 삼당연명서(三堂聯名書)를 대마번 측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인에 의한 왜관약조의 무시를 강조하면서, 앞서 약정된 7가지 약조를 왜관 안에 게시할 것, 대마번으로부터 송사(送使)가 많아 동래부의 재력으로는 접대가 곤란하다는 것, 왜관 안에 일본 측 최고 책임자인 관수(館守)가 있고, 외교교섭을 담당하는 재판(裁判)에게 교섭의 임무가 있다면 송사는 필요 없다는 것, 통신사 교류나 표류민의 송환을 제외하고는 서계만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27일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출항할 때 대마번으로부터 회답이 있었다. 내용은 연례송사 이외에는 따로 사자를 파견하지 않으며, 약정된 항목은 요청대로 왜관 안에 게시하고, 왜관 안에 머무를 자들에게 약조 준수를 명백히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임술통신사는 덕천강길의 부임 축하 이외에 왜관의 재정비를 위하여 별도로 부과된 임무를 완수한 뒤, 증빙문서로 대마번 측의 답서를 받아 왔다. 7가지 약조는 임술통신사가 대마번과 직접 교섭한 결과 그 이듬해인 1683년(숙종9)에 5개 항목으로 된 계해약조로서 왜관 안에 세워졌다.

임술통신사 일행의 일정은 1682년(숙종8) 5월 8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6월 18일 부산에서 출항하였고, 강호에 도착한 것은 8월 21일이었다. 그리고 8월 27일에 국서를 봉정하고, 9월 12일에는 강호를 떠나, 11월 16일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막부에서는 통신사 접대를 위하여 1681년 9월 3일 각 번에 접대 준비를 지시하였고, 9월 27일부터 접대 담당자를 임명하는 등 접대 체제를 정비하였다. 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 각 지역의 준비는 매우 성대하였고, 통신사 접대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기 위하여 재정적 부담이 컸다. 그러나 막부의 명령이기 때문에 재정적 압박을 감수해야 했다.

강호성에서의 빙례 절차는 이전 사행과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다만 이전과 달리 장군 앞에 설치된 발이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내려져 있었다. 이에 대하여 삼사가 항의하면서 배례를 거부하였고, 대마번주는 막부에 건의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반대로 삼사를 설득하여 겨우 배례의식을 마칠 수 있었다. 빙례가 끝나고 예에 따라 향연이 있었으며, 다음 날 예단을 증정하였다.

한편, 통신사행의 왕복 여정에서 일본의 유학자나 문인 들이 통신사행의 숙소를 방문하여 한시를 주고받는 등 문화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곳에 의학자들도 있었다. 통신사 일행에는 반드시 의원 2명이 있었으며, 1682년 임술통신사행 때부터는 일본 측의 요청으로 양의(良醫) 1명이 추가로 포함되었다.

임술통신사행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 국정의 탐색, 특히 정치·군사·경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귀국 후 정사윤지완의 장계에 의하면 일광산(日光山) 치제(致祭)의 중치, 장군 덕천강길의 취임 사정, 일본 국내의 사정, 조약 체결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숙종실록』 8년 11월 7일).

참고문헌

  • 『동사일록(東槎日錄)』
  • 『동사록(東槎錄)』
  • 나카오 히로시 지음·유종현 옮김, 『조선통신사이야기』, 한울, 2005.
  • 三宅英利 저·孫承喆 역, 『近世韓日關係史硏究』, 이론과실천, 1991.
  • 허지은, 「17세기 조선의 왜관통제책과 조일관계: 癸亥約條(1683)의 체결과정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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