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록(林世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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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보낸 관리.

개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은 약 20일 만에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반면 명은 조선과 일본이 공모하여 명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자 조선을 의심하였다. 결국, 명의 병부(兵部) 상서(尙書) 석성(石星)은 같은 해 6월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지시하여 임세록과 최세신(崔世臣)을 조선에 파견하여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도록 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임세록 등은 진상을 파악하고, 명이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을 주었다.

활동 사항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불과 20여 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선조는 파천(播遷)하는 등 크게 밀리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조선 왕이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를 주선하라고 촉구하였다. 즉, ‘가도입명(假道入明)’의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일축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명은 같은 해 5월 10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고받았고, 병부는 요동(遼東)과 산동(山東) 등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명은 조선의 청병 요청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당시 명에는 ‘조선이 일본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넘보려 한다.’, ‘조선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고 가짜 조선 왕이 요동으로 향하고 있다.’는 등의 풍문이 돌고 있었다. 또한, 명은 한양이 쉽게 함락된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하였다. 따라서 명은 선조의 파천 사실과 원조 요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나라의 명운이 달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속 명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결국 명의 병부 상서 석성은 요동도사에 명하여 조선에 정탐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소문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요동진무(遼東鎭撫)임세록이 파견된 것이다(『선조실록』 25년 5월 29일).

임세록 등이 1592년 6월 5일에 평양에 도착하자 선조는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행궁(行宮)에서 이들을 접견하였다(『선조실록』 25년 6월 5일)(『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임세록이 실상을 파악한 것은 유성룡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유성룡은 임세록과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남쪽 언덕에 보이는 왜병을 직접 보여 주었다. 이에 임세록은 급하게 회자(回咨)를 요구하여 돌아갔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결국, 명의 오해가 풀리고 명은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에 임세록은 요동도사 장삼외(張三畏)의 휘하로 양식 운반을 담당하였다(『선조실록』 26년 1월 18일). 장삼외가 의주에서 조선의 관원을 차출하여 200냥 및 청람포(靑藍布) 등을 가지고 해변에 가서 소금을 사 오라고 하였는데 소식이 없었고 장삼외는 임세록을 선조에게 보내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아오도록 한 일이 있었다(『선조실록』 26년 3월 23일). 이처럼 임세록은 임진왜란 시기 명과 조선을 오가며 외교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백사집(白沙集)』
  • 『서애집(西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호사설(星湖僿說)』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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