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문(仁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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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의 전문.

개설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영역의 문으로 단층 구조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을 창건할 때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영조대에 화재를 겪었다. 현재의 인정문은 1745년(영조 21)에 중건된 것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보물 813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궁궐은 정전 영역, 편전 영역, 침전 영역을 중심으로 궐내 각사, 왕실 생활에 필요한 제반 시설, 선원전(璿源殿), 후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 영역인 인정전 영역의 문으로 인정전 남쪽에 자리하였다. 인정문의 남쪽으로는 사다리꼴 형태의 마당이 있고 서쪽에 진선문(進善門), 동쪽에 숙장문(肅章門)이 마당을 둘러쌌다.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內兵曹) 등의 관청이 자리하였다. 경복궁 근정문(勤政門) 영역과 달리 앞마당에 금천교가 있지 않으나, 돈화문(敦化門)·금천교·진선문을 통해 인정문에 이르는 진입 과정은 개념적으로 같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달리 종축의 정연한 배치법을 따르지 않아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이 서로 같은 축선 상에 놓이지 않고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놓였다. 조참 등의 의례 시에 경복궁과 같은 일방향의 의례 공간 구성은 어렵다는 한계가 있으나 공간의 연결은 가능하였다.

인정문은 정전 문루로서 창덕궁 인정전 영역의 입구를 구성하며, 오일조참(五日朝參)에서 왕의 어좌가 놓이는 자리였다. 조참 시에 문무백관은 인정문과 진선문 사이의 마당에 서며, 조참 이전의 문외위는 진선문 바깥에 구성된다. 조참 시에 왕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고 대기하다가 선정전 서쪽의 인화문(仁和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을 거쳐 인정문으로 나아갔다(『현종실록』 10년 1월 21일).

대조하의 설행에서는 인정문을 경계로 의례 공간과 준비 공간이 구분되었다. 의례 규정에 따르면, 문무백관의 문외위(門外位)는 인정문 밖에 마련되었다. 문관, 무관 1품과 2품은 진선문과 숙장문을 잇는 동선의 북쪽에 동서로, 3품 이하는 남쪽에 동서로 각각 자리하였으며 왕세자의 막차는 문관의 앞쪽 인정문 가까이에 마련되었다. 이는 경복궁에서 영제교를 기준으로 품계의 반열을 정한 것을 번안한 결과이다. 조하례가 진행될 때에는 인정문을 닫아 의례 공간의 위요감을 형성하였다. 왕의 사자가 궁 밖으로 나갈 때에는 인정문을 경계로 의식이 구분되는 등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 영역의 입구이자 의식의 경계 요소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변천 및 현황

인정문은 창덕궁이 창건된 1405년(태종 5)에 인정전 등과 함께 영건되었다. 세종 대에 인정문, 진선문, 숙장문으로 둘러싸인 인정문 앞마당의 사다리꼴 형태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세종실록』 1년 4월 12일), 조선전기의 창덕궁 정전의 전문으로 조참례 등의 설행 장소로 충실히 활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한양 도성의 궁궐이 소실될 때 함께 사라졌다가 광해군대의 공사를 통해 복구되었다. 1744년(영조 20)에 창덕궁승정원(承政院)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정문과 좌우 행각까지 불탔으며 연영문(延英門)까지 불이 번졌다(『영조실록』 20년 10월 13일). 즉시 인정문을 복구하여 이듬해 3월에 완공되었다(『영조실록』 21년 3월 17일). 이 공사에서는 상량문을 따로 쓰지 않았고(『영조실록』 20년 11월 8일), 월랑의 기와도 고쳐 덮지 않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1년 1월 17일). 지금의 인정문은 1745년(영조 21)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였다.

1908년(융희 2)에 인정전 일곽을 개조하면서 인정문과 좌우 월랑이 바뀌었다. 당시 공사를 통해 인정전과 좌우의 동서 행각까지 복도로 연결되었고, 실내 공간에 마루를 깔고 전기 조명과 커튼 박스를 설치하는 등 이전의 궁궐 정전에서 알현소로서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인정문 역시 기둥의 위치를 옮기고 벽체를 세워 내부 공간으로 변경되었다. 원래의 정면 3칸 중 정면의 어칸과 후면의 협칸만 통행 가능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칸은 벽으로 막았다. 정면의 협칸에는 창문을 설치하여 외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정면 어칸 앞에는 계단을 놓았으며 내부에서 좌우 월랑으로 바로 연결되도록 출입구를 형성하였다. 인정문 월랑의 경우 개조 이전에 바깥쪽으로만 벽으로 막히고 인정전 전정 방향으로는 기둥열로만 구획되었던 것을 개조 이후에는 양쪽을 모두 벽으로 막아 실내 공간화하였다.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 실내 공간으로 연결되었으며 인정문은 전문이 아닌 현관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해방 이후 1962년 7월 25일에 창덕궁과 후원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국가문화재로서 정식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 들어 변형된 부분의 철거와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5년 1월 8일에 보물 813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단층의 문으로 중층인 경복궁의 근정문과는 차이가 있다. 하부에는 석재로 기단과 계단을 조성하였고 어칸으로 진입하는 어도와 연결되었다. 원형 초석 위에 원기둥을 올렸고 상부에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작을 얹었다. 어칸에는 3개의 주간포를, 협칸에는 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다.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로 다른 기둥보다 높다.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근정문 등 중층 문루가 우진각지붕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양상도회하고 취두, 용두, 잡상, 토수를 얹어 장식하였다. 용마루에는 배꽃문양 3개를 새겼는데 대한제국의 국장(國章)이다. 인정전에는 5개의 문양을 새겼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조를 노출하였으며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루단청으로 하였다. 인정문 좌우로는 각각 10칸의 행각을 이었다. 편액은 선조대의 명필 이해룡(李海龍)이 쓴 것으로 전한다. 전체적으로 경복궁 근정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이에 대해 중종은 조하와 조참을 잘 진행하지 않는 이유가 인정문이 협착하기 때문이라는 전교를 내린 바 있다(『중종실록』 20년 11월 26일).

관련사건 및 일화

세종대에는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인정문 밖 행랑을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문 앞마당의 형태가 지형을 따라 사다리꼴로 조성되어 문제가 되었다(『세종실록』 1년 4월 12일). 이에 상왕 태종은 인정문 밖에 행랑을 대신하여 다시 담장을 쌓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세종실록』 1년 4월 15일). 성종대에 문과 초시(初試)와 중시(重試)를 함께 치르면서 인정전 마당에서 함께 진행하면 함부로 남의 손을 빌어 제술하는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인정전 마당에서 중시를, 인정문 밖에서 초시를 치르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0년 2월 5일). 연산군대에는 인정문을 닫아 잡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6월 11일), 조하와 조참을 이유로 인정문, 장묘벽 등을 헐도록 명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1일). 광해군 연간에는 대전별감(大殿別監)임경신(任敬信)이라는 자가 도포에 검은 초립으로 변복하고 인정문에서 나오다가 붙잡히는 등의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8년 2월 19일).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의 즉위식이 인정문에서 있었다(『효종실록』 즉위년 5월 13일)(『현종실록』 즉위년 5월 9일)(『숙종실록』 즉위년 8월 23일). 인정문에서의 친국(親鞫)과 향지영(香祗迎)에 관한 기록이 많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일정전전어도취설설계도」「제1호 알현소급부속건물평면도」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기세황·우동선, 「1908년 창덕궁 인정전일곽의 개조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23권 2호, 2014.
  • 이규철, 「통감부 시기 궁내부 왕실 건축조직의 재편」, 『건축역사연구』23권 5호, 2014.
  • 장필구, 「20세기 전반기 조성왕실의 변화와 창덕궁 건축활동의 성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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