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李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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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0년(중종 35)∼1604년(선조 37) = 65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이고 증직(贈職)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 자(字)는 강중(剛仲)이고, 호(號)는 국헌(菊軒)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觀察使)이세장(李世璋)이고,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정주 목사(定州牧使)양숙(梁淑)의 딸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현인(賢人)인 이목(李穆)의 손자이고, 병조 정랑(兵曹正郞)이갱(鏗)의 동생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 그 후 6년이 지난 1582년(선조 15)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의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의 저작(著作)·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서, 공조와 호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무장 현감(茂長縣監)을 지내고, 평안·충청·경상 3도의 도사(都事)를 지냈으며, 용천 군수(龍川郡守)와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와 호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을 거쳐서, 종부시(宗簿寺)와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비문] 1594년(선조 27) 사헌부 지평(持平)되었다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597년(선조 30)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그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선조실록』 30년 10월 2일),(『선조실록』 30년 10월 27일) 1598년(선조 31) 형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1598년(선조 31) 호조 참의와 병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우승지(右承旨)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 31년 3월 9일),[선조 32년 윤4월 6일 3번째기사] 이후, 한직(閒職)을 구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는데, 근검절약하면서 백성이 편안하도록 정사를 보살폈다.[비문] 1603년(선조 36)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비문] 1604년(선조 37) 여름 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 65세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세상을 떠난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맑고 조용하였다. 이철은 1540년(중종 35) 아버지 관찰사이세장(李世璋)과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父母)가 특별히 막내아들을 사랑했지만,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청렴했던 남편 이세장의 뜻에 따라 아들에게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다. 이철은 막내였으므로, 양친을 일찍 여의고, 맏형 병절 교위(秉節校尉)이건(李鍵)과 둘째형 부사과(副司果)이난(李鑾)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성장하면서 맏조카 이구호(李久濠)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마침내 넷째 형 이갱(李鏗)과 맏조카 이구호와 함께 명경과(明鏡科)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문과에 급제하고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였다. 이철·이갱 형제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함께 공부하던 여러 유생들 모두 이들 형제가 학문에 정통하여 그 지론(至論)에 있어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송하였다. 특히 성균관의 유생 가운데 이철만이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잘 알고 있다며, 모두 그를 『춘추』의 제1인자라고 추켜세웠다.

승지이철(李鐵)은 양친(兩親)이 살아계실 때, 자기가 받은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항상 애통하게 여겨,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님 네 분과 누님 세 분을 한결같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처럼 섬겼다. 친족들과는 화목하게 지냈으며 재산이 있건 없건 간에 함께 나누어 썼다.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겉으로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더불어 지낼 때에는 마치 아녀자처럼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친구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바로잡아 주었으나 뒷말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아는 친구들은 늙도록 마음이 변치 않았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통진현(通津縣) 여금산(餘金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비문]

부인 사천목씨(泗川睦氏)는 사직서 영(社稷署令)목심(睦諶)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구징(李久澄)은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고, 차남 이구함(李久涵)은 감역(監役)을 지냈다. 장녀는 사인(士人) 유숭인(柳崇仁)에게, 차녀는 군수(郡守)이기설(李基卨)에게, 3녀는 정랑(正郞)김광환(金光煥)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김광환은 김상헌의 형인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다. 측실(側室)에서 1남을 낳았는데, 서자 이구흡(李久洽)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관(武官)이 되었다.

맏아들 이구징은 증조부 이목(李穆)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계곡(溪谷)장유(張維)에게 묘비(墓碑)와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하여 그 무덤 앞에 세우고 묻었으며, 청송 군수(靑松郡守)로 있을 때 조부 이세장이 편집한 증조부 이목의 문집 『이평사집(李評事集)』을 간행하였다. 지금 중간본 『이평사집(李評事集)』 2권 1책이 규장각(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다. <무오사화>의 현인(賢人) 이목(李穆)의 사적이 후세에 자세하게 전해진 것은 그 아들 이세장과 증손자 이구징의 헌신적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상촌집(象村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수북유고(水北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