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열(李仲悅)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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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중열 |
한글표제 | 이중열 |
한자표제 | 李仲悅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서예가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습지(習之) |
호 | 과재(果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18년(중종 13) |
사망 | 1547년(명종 2) 3월 |
본관 | 광주(廣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고요동(高要洞) |
증조부 | 이세좌(李世佐) |
조부 | 이수정(李守貞) |
부 | 이윤경(李潤慶) |
모_외조 | 고령 신씨(高靈申氏) : 신종하(申宗河)의 딸 |
형제 | (동생)이숙열(李叔悅), 이계열(李繼悅) |
처_장인 | 양주 조씨(楊州趙氏) : 조덕수(趙德壽)의 딸 →(자녀)1남 |
자녀 | (1자)이사온(李士溫)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중열(李仲悅)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39년 2월 17일, 『인종실록』 1년 윤1월 15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명종실록』 1년 8월 6일, 『명종실록』 1년 8월 7일, 『명종실록』 2년 3월 13일, 『중종실록』 37년 10월 30일 |
총론
[1518년(중종 13)∼1547년(명종 2) = 3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이조 정랑(正郞)과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등을 지냈다. 자는 습지(習之)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이윤경(李潤慶)이고,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진잠현감(鎭岑縣監)신종하(申宗河)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지낸 이수정(李守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 판사(判事)를 지낸 이세좌(李世佐)이다. 영의정이준경(李浚慶)의 조카이기도 하다. 숙부 이준경에게 사사(師事)하였고, 정황(丁熿)·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황(李滉)이 학문의 벗으로 교유하기를 허락하였다. 명종 대에 <이휘(李煇)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선조(宣祖) 즉위 후 신원(伸寃)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39년(중종 34)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1541년(중종 36)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고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1542년(중종 37)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 옮겼다가 성균관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차례로 승진한 후에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 38)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를 겸하고, 자문(咨文)과 점마(点馬)를 위하여 의주(義州)의 의순관(義順館)에 가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베껴 쓰며, 사신 일행의 마필(馬匹)을 점검하였다. 이중열이 해서(楷書)를 잘 썼으므로 당시 명(明)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주문(奏聞)은 모두 그가 쓴 것이 많았다. 그러나 사신 일행의 마필을 철저히 점검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면되었다.(『중종실록』 39년 2월 17일)
1544년(중종 39) 소윤(少尹)의 원흉(元兇) 이기(李芑)가 순변사(巡邊使)로 영남(嶺南)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이중열을 천거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에 서용하게 하고, 김진종(金振宗)을 그의 종사관(從事官)을 삼았다. 김진종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만두더라도 이중열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바로 아버지 이윤경이 이기를 탄핵한 일로 파면되었을 뿐이다.” 하였다. 이전에 이중열의 아버지 이윤경이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사헌부(司憲府) 헌납(獻納)김진종과 함께 이기를 거칠고 음험한 사람이라고 탄핵하였기 때문에 이기가 그들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중열·이윤경 부자를 위태롭다고 여겼다. 당시 인종(仁宗)과 명종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윤(大尹)의 윤임(尹任) 일파와 소윤의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윤경은 소윤에 가담하였으나, 아들 이중열은 대윤을 지지하였다. 이중열은 사림파(士林派)와 가까웠는데, 대윤의 윤임이 사림파와 손을 잡고 사림파를 다시 등용하였던 것이다.
인종~명종 시대 활동
1444년(중종 39) 형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11월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의 윤임이 이중열을 이조 정랑으로 발탁하여 승문원 교리(校理)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조 정랑이중열은 사림파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고, 조광조(趙光祖)의 제자 정황(丁熿)을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하였다. 이에 소윤 윤원형 일파가 크게 반발하였다.(『인종실록』 1년 윤1월 15일)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해 8월 소윤의 윤원형 일파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밀지를 받아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등을 잡아 죽이고, 사림파의 인물들을 잡아서 귀양을 보내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그때 사림파 이휘가 국문(鞫問)을 받고 공초(供招)하기를, “이조 정랑이중열의 신의 집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근래 사람들이 대윤·소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하였므로, 신이 충고하기를, ‘이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이에 이중열은 한동안 몸을 숨겼다가 숙부 이준경의 설득을 받고 나와 변명한 끝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546년(명종 1) 이기의 심복 진복창(陳復昌)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이휘의 옥사에 연루된 이중열의 죄를 다시 논의하여,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귀양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가 바로 다음날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바꾸어 귀양 보냈다.(『명종실록』 1년 8월 6일),(『명종실록』 1년 8월 7일) 당시 윤원형과 이기는 ‘을사(乙巳) 2원흉(元兇)’으로 불렸는데, 특히 이기 일당이 이중열·이윤경 부자를 미워하여, 한번 가면 돌아오기 어렵다는 삼수갑산으로 이중열을 귀양 보냈던 것이다.
한편 이중열은 이조 정랑으로 있을 때 윤원형의 족친 윤춘년(尹春年)을 북방의 우역관(郵驛官)으로 좌천시킨 적이 있었다. 윤춘년은 이중열을 ‘이휘의 당(黨)’이라고 지목하고, 또 이중열이 인사 행정에서 ‘어진 자를 골라야 한다[擇賢].’고 한 말을 가지고 ‘세자를 인종과 명종 중에 어진 자를 골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사헌부 대사헌윤원형은 이휘·이중열·정황이 붕당(朋黨)을 만들었다고 탄핵하고, 이기·진복창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은 ‘택현(擇賢)’을 문제 삼아 마침내 이중열에게 사약(死藥)을 내리게 하였다. 그 결과 1547년(명종 2) 3월 이중열은 갑산(甲山)의 유배지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0세였다.(『명종실록』 2년 3월 13일) 그해 윤9월에 이기·진복창은 이중열의 아버지 성주목사(星州牧使)이윤경을 아들의 죄와 연좌시켜서 파직시켰다.
1567년(선조 즉위년) 6월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명종의 왕비이자 심희수(沈喜壽)의 누이가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1568년(선조 1) 인순왕후는 선왕(先王 : 명종)의 뜻을 받들어 을사사화 때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모두 신원해 주고 유배를 갔던 사람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였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 윤원형을 영의정에서 파직하여 조정에서 쫓아내고, 사림파를 구제하려고 하다가 미처 사림파를 사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1570년(선조 3) 이중열도 사면을 받고 본래의 관직을 모두 회복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의 기록을 편집한 책이 을사사화의 전말을 기록한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담겨 있다.
성품과 일화
이중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모가 준수하고 정숙하였으며, 성품이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어버이를 독실하고 지성스럽게 섬기고, 그 뜻을 받들고 봉양하면서 그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여러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좋았으며, 숙부인 영의정이준경 내외를 한결같이 부모처럼 받들고 섬겼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윤경의 명으로 숙부 이준경에게 나아가 수업(受業)하였다, 숙부 이준경은 공부를 가르칠 때 매우 엄격하여 분위기를 어지럽게 할 겨를을 주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루 종일 숙부의 곁에서 낭랑히 글을 읽어야 했고, 감히 아이들과 나가서 놀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중열이 성장할 때까지 동네 사람들 가운데 이중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적었다. 나중에 이중열이 회고하기를, “사람들 가운데 나와 같이 부형(父兄)을 두려워한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1542년(중종 37) 10월 중종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는데, 검토관이중열이 아뢰기를, “중외(中外)의 모든 관청이 해이하지 않은 데가 없어서 모두 겉치레로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강론하는 중대한 일마저도 겉치레로 하고 있습니다. 근래의 경연은 의례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두 번 강독하고 모두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위에서는 아래에 묻지 않고, 아래에서는 위에 계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중종실록』 37년 10월 30일) 이는 젊었을 때에는 조광조와 열성적으로 경연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중종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는 형식적으로 경연에 나와 겉치레로 공부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때 중종은 55세, 이중열은 25세였는데, 젊은 이중열이 중종에게 직언(直言)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그의 용기를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조광조를 동경하고 사림파를 지지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중열이 조정에 있을 때에 이황은 이중열을 ‘망년(忘年 : 나이를 따지지 않는 것)의 벗’으로서 서로 학문을 교유(交遊)하도록 허락하였다. 또 이중열은 정황·유희춘·노수신 등과도 우의(友誼)가 매우 두터웠다. 정황은 조광조의 제자로서 을사사화에 뒤이어 일어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거제도로 귀양을 간 후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김안국(金安國)의 제자였는데, 그 역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살아남아 선조 때 이조 참판(參判)까지 지냈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희춘에게 배웠으므로,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의 덕택이다.”고 하였다. 노수신은 이연경(李延慶)의 제자로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역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었으나, 살아남아서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고요동(高要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남편보다 25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부인 양주 조씨는 익산군수(益山郡守)조덕수(趙德壽)의 딸이다. 자녀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이사온(李士溫)은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월정집(月汀集)』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기언(記言)』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
- 『숭덕재유고(崇德齋遺稿)』
- 『만헌집(晩軒集)』
- 『목재집(木齋集)』
- 『미암집(眉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야계집(倻溪集)』
- 『유헌집(游軒集)』
- 『자저(自著)』
- 『지퇴당집(知退堂集)』
- 『지호집(芝湖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