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李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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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익 |
한글표제 | 이익 |
한자표제 | 李瀷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여함(汝涵), 형여(泂汝) |
호 | 간옹(艮翁)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9년(선조 12) |
사망 | 1624년(인조2) |
본관 | 경주(慶州) |
주거지 | 충주(忠州) 감곡면 오갑리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충주(忠州) 감곡면 오갑산(烏岬山) |
증조부 | 이자침(李自琛) |
조부 | 이란(李鸞) |
부 | 이유일(李惟一) |
모_외조 | 여흥 민씨(驪興閔氏) : 민덕룡(閔德龍)의 딸 |
형제 | (형)이탁(李濯) (동생)이직(李溭) |
처_장인 | (첫째 부인)영월 엄씨(寧越嚴氏) : 엄인록(嚴仁祿)의 딸 (둘째 부인)평산 신씨(平山申氏) : 신길원(申吉元)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이인실(李仁實) (1녀)권구(權坵)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익(李瀷)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7년 3월 26일, 『광해군일기』 7년 4월 28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18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1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4일, 『광해군일기』 7년 5월 25일, 『광해군일기』 10년 11월 16일, 『인조실록』 2년 2월 15일 |
총론
[1579년(선조 12)∼1624년(인조 2) = 46세]. 조선 후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형여(泂如) 또는 여함(汝涵)이고, 호는 옥포(玉浦)라고 하다가 나중에 간옹(艮翁 : 세상과 어긋나게 사는 사람)으로 고쳤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충주(忠州) 감곡면 오갑리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이유일(李惟一)이고,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참봉(參奉)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란(李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자침(李自琛)이다. 병마사(兵馬使)이수일(李守一)의 조카이자, 우의정이완(李浣)의 4촌형이기 하다. 송상인(宋象仁)·정온(鄭蘊)과 절친한 사이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 양과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성균관 박사(博士)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차례대로 승진하였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 7년 3월 26일),(『광해군일기』 7년 4월 28일)
1615년(광해군 7) 광해군은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있는 경운궁(慶運宮)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로 하여금 교대로 지키도록 하였다. 이익이 인피(引避)하면서 가장 먼저 광해군에게 언관(言官)이 숙직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진계하고 다음에 시사(時事)에 대해 직언(直言)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다.(『광해군일기』 7년 5월 18일) 광해군이 노하여 이익에게 묻기를,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하는 짓이냐.”고 하자, 다른 간관(諫官)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항간에서 모두들 하는 말입니다. 진언(進言)은 주상(主上)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간관으로서 남의 사주를 받고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일곱 차례 형신(刑訊)을 하였으나, 이익의 대답은 모두 똑같았으며 조금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 이익은 문초를 받는 중에 “임금의 외척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립니다.”고 말하였으므로, 광해군이 더욱 노하여 삼성(三省 : 의정부·사헌부·의금부)에서 함께 추국(推鞫)하라고 명령하였다. (『광해군일기』 7년 5월 21일),(『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광해군일기』 7년 5월 23일) 이익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기자헌(奇自獻)이 두 차례 차자(箚子)를 올려 이익을 구하고자 적극 해명하였고, 또 병을 핑계대며 이익을 심문하는 국문청(鞫問廳)에 나가지 않았다.(『광해군일기』 7년 5월 24일),(『광해군일기』 7년 5월 25일) 이 덕분에 이익은 잔혹한 형벌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죽음을 면하게 되었으나 석방되지 못하고 옥(獄)에 갇혀서 지냈다.
그리고 3년 후인 1618년(광해군 10) 겨울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하는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였고, 이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그때 옥에 있던 사람 가운데 매를 맞아 죽는 서인(西人)의 중진도 있었으나, 이익은 젊은 신진이었으므로 사형을 감하여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11월 16일) 광해군 말기에 이익은 제주도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연구하고 항상 공경을 위주로 하는 삶을 살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제주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그 사이에 예조 정랑(正郞)과 병조 정랑·성균관 직강(直講)을 지냈다. 이조 정랑에 서너 번 의망(擬望 : 후보자로 추천되는 것)되기도 하였는데, 친구들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찾아가서 청탁해 보도록 권하였으나, 이익은 웃으며 응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명되더라도 약 한 달 남짓 근무하다가 바로 그만두고, 고향의 선영(先塋) 아래 초막(草幕)으로 돌아와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놓고 태연히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여러 번 사헌부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병을 핑계되고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24(인조 2)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와서 관직에 부임한 지 채 10일도 되지 않았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이 서울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 어가(御駕)가 한밤중에 서울 도성을 빠져나갔는데, 밤이 깊었고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이익은 미처 알지 못하고 어가를 호종(扈從)하지 못하였다. 며칠 뒤에 도보로 걸어서 공주(公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갔으나 임금을 바로 호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여, 이미 관직은 면직되어 있었다.(『인조실록』 2년 2월 15일) 이에 이익은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고향 충주 감곡면 오갑리로 돌아와서 독실하게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간혹 지팡이를 짚고 수석(水石)의 사이를 거닐면서 자연 속의 삶을 즐겼다. 그리고 그 해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46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지극히 성실하며 행실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서 소과(少科)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그 뒤에도 마음을 다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므로, 학문을 크게 성취할 뻔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시대에 5년 동안을 귀양살이를 하였고, 인조 시대에 그 뜻을 이루어 보려고 하다가, 중도에 젊은 나이로 요절(夭折)하는 바람에 자기 꿈을 다 펴보지 못하였다.
광해군 대에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여러 명사(名士)들이 죄에 연루되어 잇따라 구금되면서 이익은 조직(趙溭)·정온(鄭蘊)과 같은 유학자들과 같은 옥(獄)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함께 거처하며 담론(談論)하다가 마침내 경서를 강론하게 되었는데, 공자(孔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말씀에서 취하여 ‘가의와(可矣窩)’ 석 자를 써서 옥문에 붙여놓고, 열심히 경서를 읽으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광해군 말기에 이익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성리서(性理書)만을 읽고 항상 공경을 위주로 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매일 『서명(西銘)』·『경재잠(敬齋箴)』을 읽고 또 외었으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1백 번 읽고 깊이 궁구(窮究)하였는데, 스스로 깨닫고 반성하는 바가 많았다. 늦게 거문고를 배워서 때때로 달이 밝은 밤에 몇 곡씩 타기도 했다. 매일 아침에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뜰에 내려가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방바닥에 꿇어앉아 저녁이 저물도록 책을 읽었는데,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송상인(宋象仁)과 정온이 같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가끔 모여 서로 시를 지어 수창(酬唱)하면서 소일(消日)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감곡면오갑산(烏岬山)에 있는데,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무덤은 쌍분인데, 둘째 부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나란히 묻혀 있다. 그가 죽은 뒤에 광해군 때 곧은 절조를 지켰다고 하여 직첩(職牒)과 품계(品階)를 돌려주고,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으로 추증하였다.
첫째 부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엄인록(嚴仁祿)의 딸이고, 둘째 부인 평산 신씨는 문경현감(聞慶縣監)신길원(申吉元)의 딸이다. 영월 엄씨는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나, 평산 신씨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인실(李仁實)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를 지냈고, 딸은 생원(生員) 권구(權坵)에게 시집갔다. 이인실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사헌부 지평김원량(金元亮)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5남을 두었는데, 이정(李炡)·이성(李煋)·이병(李炳)·이형(李炯)·이정(李烶)이다. 이병과 이정은 윤선거(尹宣擧)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병의 아들 이중협(李重協)과 이정의 아들 이중술(李重述)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지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곡집(明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