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무(李宜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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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의무 |
한글표제 | 이의무 |
한자표제 | 李宜茂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중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형지(馨之) |
호 | 연헌(蓮軒)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49년(세종 31) |
사망 | 1507년(중종 2) |
본관 | 덕수(德水) |
주거지 | 서울, 충청도 면천(沔川) |
묘소소재지 |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장자동(長者洞)의 선영(先塋) |
증조부 | 이양(李揚) |
조부 | 이명신(李明晨) |
부 | 이추(李抽) |
모_외조 | 무송 윤씨(茂松尹氏) : 윤회(尹淮)의 딸 |
형제 | (형)이의수(李宜修), 이의석(李宜碩), 이의번(李宜蕃), 이의영(李宜榮) (동생)이의연(李宜衍) |
처_장인 | 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희(成熺)의 딸 →(자녀)5남 2녀 |
자녀 | (1자)이권(李菤) (2자)이기(李芑) (3자)이행(李荇) (4자)이령(李苓) (5자)이미(李薇) (1녀)노우량(盧友良)의 처 (2녀)조계상(曺繼商)의 처 |
저술문집 | 『연헌잡고(蓮軒雜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의무(李宜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7년 3월 22일, 『성종실록』 17년 5월 26일, 『성종실록』 18년 2월 18일, 『성종실록』 18년 12월 26일, 『성종실록』 19년 10월 25일, 『성종실록』 23년 4월 3일, 『성종실록』 24년 4월 10일, 『성종실록』 24년 4월 18일, 『연산군일기』 1년 8월 12일, 『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중종실록』 2년 6월 2일, 『중종실록』 2년 10월 14일 |
총론
[1449년(세종 31)∼1507년(중종 2) = 59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과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자는 형지(馨之)이고, 호는 연헌(蓮軒)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충청도 면천(沔川)이다. 아버지는 온양군사(溫陽郡事)를 지낸 이추(李抽)이고, 어머니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윤회(尹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이명신(李明晨)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를 지낸 이양(李揚)이다. 영의정윤자운(尹子雲)과 사촌 간이자, 영의정이기(李芑)와 좌의정이행(李荇)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67년(세조 13)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합격하였고, 1477년(성종 8) 식년(式年)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 바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1486년(성종 17)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을 역임하였다. 이때 치러진 문과(文科) 중시(重試)에서 잇달아 3번 1등하면서, 유둔(油芚) 1장과 활[弓]등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 17년 3월 22일),(『성종실록』 17년 5월 26일) 1487년(성종 18)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사슴 가죽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 18년 2월 18일) 이 해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로 전임되었는데, 학문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성종의 뜻에 따라 밀양(密陽) 지역의 학교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성종실록』 18년 12월 26일) 1488년(성종 19)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1490년(성종 21)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고,(『성종실록』 19년 10월 25일) 1492년(성종 23)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1493년(성종 24)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성종실록』 23년 4월 3일) 이때 전라도 임실현감(任實縣監)노처원(盧處元)이 남형(濫刑)하여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노처원 사건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처원의 동생 노처리(盧處利) 등이 밤에 이의무 일행의 행낭을 수색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때 이의무가 노처리를 잡아다가 장형(杖刑)을 가하는 과정에서 죽게 되면서 그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성종실록』 24년 4월 10일),(『성종실록』 24년 4월 18일)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오른 후 1495년(연산군 1)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 되었고, 이듬해인 1496년(연산군 2)에는 사헌부 집의(執義)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8월 12일)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어천(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1502년(연산군 8)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을 거쳐서 군기시(軍器寺)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외직을 청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는데, 공물(貢物)을 기한 내에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을 당시, 그는 홍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1507년(중종 2)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손주(孫澍)는 이의무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이의무는 중종으로부터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받았다.(『중종실록』 2년 6월 2일),(『중종실록』 2년 10월 14일) 그해 겨울 관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
문집으로 『연헌잡고(蓮軒雜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이의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태평스럽고 도량이 넓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마치 뜬구름처럼 여겨서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욕심도 없고 즐기는 것도 없이 한가롭고 조용하게 지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서 학문을 토론하고 문장을 감식(鑑識)하는 것은 좋아하였는데, 신분이나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고, 성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였다. 그의 차남 이기와 3남 이행이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난 문장가가 되었던 것은 아버지 이의무가 아들들의 문장을 감식(鑑識)하여 좋은 문장을 짓도록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행은 조선 전기 훈구파(勳舊派)를 대표하는 대문장가가 되었다.
이의무는 30여 년 동안 벼슬하였으나, 집에는 저축이 없었고, 벼슬을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마치 가난하고 검소한 선비의 집처럼 쓸쓸하였다. 시문(詩文)을 짓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문체가 확실하고 정교하였으나, 순수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는 문장의 감식에도 매우 밝았기 때문에 문장에 빼어난 재주와 조예가 있는 당대의 선비들은 자기가 지은 글을 가지고 이의무의 집으로 찾아와서 그에게 한 번 품평(品評)을 받으면, 마치 문단의 등용문을 통과한 듯이 기뻐하였다. 또한 과거의 일을 자세하게 기억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문서를 만들어 제정할 일이 있으면, 그가 반드시 참여하여 고증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학문에 빠져있었으므로,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아버지 이추는 다섯째 아들인 이의무가 병이 날까 염려하여 공부하는 책을 모두 빼앗고 조카들을 시켜서 지켜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잠을 자면서도 입으로 경전을 외었다고 한다. 이미 어렸을 때 4서(書) 5경(經)을 줄줄 외우고, 얼마 후에는 어려운 『시경(詩經)』·『서경(書經)』의 대의(大義)를 거의 깨달았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장자동(長者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홍언필(洪彦弼)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성희(成熺)의 딸이다. 대제학(大提學)성석용(成石瑢)의 손자인 성희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學士)로서 세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세조(世祖) 때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계획하였다가,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김해로 귀양을 갔다 죽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함하여 ‘사칠신(死七臣)’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의무의 부인 창녕 성씨는 약혼하기 전에 집안에 불행이 닥쳐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였으므로, 주변의 도움 없이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이의무의 어머니 무송 윤씨가 그 소문을 듣고 다섯째 아들 이의무와 혼인시켰다. 당시 반역을 도모한 죄인의 딸과 혼인한 사람들이 금고(禁錮)형에서 벗어나려고 이혼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의무처럼 이러한 집안의 딸과 혼인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어머니 무송 윤씨는 집현전 부제학윤회의 딸이었으므로, 아버지 윤회가 집현전에서 젊은 학사 성삼문·박팽년(朴彭年)·성희 등을 길러낸 것을 생각하며, 어려움을 각오하고 아들 이의무와 성희의 딸을 혼인시켰던 것이다. 부인 창녕 성씨는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 무송 윤씨를 섬겼는데,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며 그 뜻을 맞추었다. 또 5남 2녀를 낳아 자녀를 모두 잘 가르쳐서,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의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여, 정승 2인, 판서(判書) 1인, 남병사(南兵使) 1인이 탄생하였다. 남편 이의무는 “집안일은 내가 걱정할 것이 없다.”라는 말로 부인 창녕 성씨를 칭찬하였다. 부인 창녕 성씨는 남편 이의무가 세상을 떠나고 5년 뒤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이의무의 묘소에 함께 합장되었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권(李菤)은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남도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 이른바 남병사(南兵使)를 지냈고, 차남 이기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으며, 3남 이행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4남 이영(李苓)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안군수(遂安郡守)·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냈고, 5남 이미(李薇)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예조 판서를 지냈다. 장녀는 진사(進士) 노우량(盧友良)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호조 판서창녕군(昌寧君)조계상(曺繼商)에게 시집갔는데, 조계상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묵재집(默齋集)』
- 『백헌집(白軒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희락당고(希樂堂稿)』
- 『용재집(容齋集)』
- 『동문선(東文選)』
- 『동각잡기(東閣雜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서계집(西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