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록(李元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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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4년(중종 9)∼1574년(선조 7) = 6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공조 참의(參議)와 이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정서(廷瑞)이고, 호는 송담(松潭)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산수(璋山守) 이조(李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낸 이의무(李宜茂)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낸 이추(李抽)이다. 영의정이기(李芑)와 예조 판서(判書)이미(李薇)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황(李滉)·노수신(盧守愼)과 가까운 친구였다.

중종~선조 시대 활동

1540년(중종 35)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고, 1541년(중종 36)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중종실록』 36년 10월 29일),[『방목(榜目)』] 1543년(중종 38)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다가 1544년(중종 39)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 38년 6월 21일),(『중종실록』 39년 5월 12일)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이기 일파가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당시 윤임에 의해 등용된 많은 사림파(士林派) 선비들도 같이 화를 당하였는데, 이원록은 권신이던 큰아버지 이기를 설득하여 이황 등의 많은 선비들을 구하였다.(『선조실록』 7년 7월 6일) 그해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8월 16일) 이어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1546년(명종 1) 사간원 헌납(獻納)과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8월 24일),(『명종실록』 1년 2월 15일),(『명종실록』 1년 11월 2일) 1547년(명종 2) 이조 정랑이 되었다가 1549년(명종 4) 병조 정랑으로 전임되었는데, 소윤의 과격파인 이기의 전횡이 심해지자 그를 비판하다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명종실록』 2년 5월 12일),(『명종실록』 4년 2월 3일),(『명종실록』 4년 2월 4일),(『명종실록』 7년 4월 28일) 1565년(명종 20)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이기와 문정대비가 죽고 난 후에야 16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명종실록』 20년 12월 2일)

1567년(선조 즉위년)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가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거쳐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그 후 벼슬살이에 뜻을 접고 두문불출하다가 1574년(선조 7) 10월 11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원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관대하였으며, 기개(氣槪)가 있고, 의(義)를 좋아하였다.(『선조수정실록』 9년 10월 1일) 그는 아버지 이행(李荇)의 문장을 계승하여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났었다. 그러나 대윤과 소윤의 당파 싸움에서 정도(正道)를 지키려고 하다가, 그의 문학이 중도에 폐기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이원록은 이행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행은 훈구파(勳舊派)를 대표하는 문장가였고, 큰 아버지 이기는 윤원형과 함께 소윤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젊은 시절 이원록은 사림파에 속하는 이황·노수신과 가깝게 지내며, 서로 교유하였다. 중종 말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인종(仁宗)을 지지하는 대윤의 윤임과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의 윤원형이 크게 대립하였다. 1544년(인종 즉위년)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은 사림파의 젊은 인재들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였는데, 당시 이조 정랑은 사림파 노수신이었다. 이듬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과 이기는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아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고, 사림파의 신진 사류들을 아울러 숙청하였다.

신진 사류인 이황과 노사신도 이때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조 정랑이었던 이원록은 큰아버지인 병조 판서이기에게 “이황은 성격이 겸손하고 담박하여 시론(時論)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라며 강력하게 변호해 주었고, 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에게도 이황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이에 이기는 사림파 인사들의 형률을 적용할 때 문정왕후에게 “요즈음 선비들의 기풍이 아름답지 못하여,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니,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들으니, 이황은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변호해 주었다. 호조 판서임백령도 병조 판서이기의 편을 들어 “이황이 근신하여 자기 몸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제 만일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전에 죄를 받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두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종과 문정왕후는 이황을 다시 등용하라고 명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이원록은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근무하다가 큰 아버지 이기에 의하여 1547년(명종 2) 이조 정랑에 발탁되어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았다. 당시 이기는 이원록이 반드시 그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문정왕후 또한 이원록이 반드시 이기를 많이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아주 후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매번 이기에게 사류들에 대한 화(禍)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말을 하면서 이기는 차츰 이원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이원록이 사람들에게 “숙부가 하는 일을 보면 후일에 우리 집안의 재앙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은밀히 말하였는데, 그 말이 퍼져나갔다. 그런 가운데 이원록은 술에 취한 김에 임백령을 찾아가 그의 변변치 못함을 비웃으며 꾸짖었으므로, 그가 원한을 품고 이기에게 이간질하였다. 이원록의 태도를 유감스럽게 여긴 이기는 결국 대간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하였고, 이에 문정왕후는 ‘이원록이 한 말을 보니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고 크게 노하여 장 일백을 친 뒤 극변(極邊)인 평안도 강계(江界)에 유배시키는 극형을 내렸다.(『선조수정실록』 9년 10월 1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과천(果川)에 있는데,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전기(傳記)가 남아있다. 현재 「이원록(李元祿)의 간찰(簡札)」 1점이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다. 종이의 크기는 가로 28㎝, 세로 26㎝이다. 오세창(吳世昌)이 수집하여 엮은 『선현유묵(先賢遺墨)』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첫째 부인 덕수장씨(德水張氏)는 성균관 사성(司成)장옥(張玉)의 딸이고, 둘째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유(韓維)의 딸인데, 모두 자녀가 없었다. 측실(側室)에서 3남을 두었는데, 서자는 이신운(李汛雲)·이경운(李敬雲)·이연운(李延雲)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간잡고(蓮幹雜稿)』
  • 『용재집(容齋集)』
  • 『대동야승(大東野乘)』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미수기언(眉叟記言)』
  • 『문소만록(聞韶漫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퇴계집(退溪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동악집(東岳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우재집(迂齋集)』
  • 『묵헌집(默軒集)』
  • 『동호집(東湖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소고집(嘯皐集)』
  • 『문봉집(文峯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