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부(李英符)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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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영부 |
한글표제 | 이영부 |
한자표제 | 李英符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응서(應瑞)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87년(성종 18) |
사망 | 1523년(중종 18) |
본관 | 광주(廣州) |
주거지 | 서울, 전라도 임피(臨陂) |
묘소소재지 | 전라도 옥구(沃溝) 임피 |
증조부 | 이예손(李禮孫) |
조부 | 이극견(李克堅) |
부 | 이반(李攀) |
모_외조 | 여산 송씨(礪山宋氏) : 송희열(宋希烈)의 딸 |
처_장인 | 용인 이씨(龍仁李氏) : 이효완(李孝完)의 딸 →(자녀)3남 1녀 |
자녀 | (1자)이수경(李首慶) (2자)이중경(李重慶) (3자)이복경(李復慶) (1녀)이자(李磁)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영부(李英符)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8년 11월 9일, 『중종실록』 14년 12월 2일, 『중종실록』 18년 6월 19일 |
총론
[1487년(성종 18)∼1523년(중종 18) = 37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자는 응서(應瑞)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전라도 임피(臨陂)이다. 아버지는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지낸 이반(李攀)이며, 어머니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송희열(宋希烈)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이극견(李克堅)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예손(李禮孫)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직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어 현량과(賢良科) 폐지를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겨우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10년(중종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그 뒤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513년(중종 8) 중종이 전정(殿庭)에서 유생(儒生)들을 책시(策試)하였는데, 이영부가 1등을 차지하였다.(『중종실록』 8년 11월 9일) 18세가 되던 1516년(중종 11)에는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2등 방안(榜眼)으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항상 동료들을 압도하였다.
처음에는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이 되었다가 학관(學官)으로서 성균관 전적(典籍)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형조 좌랑(佐郞)과 형조 정랑(正郞),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掌令),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 봉상시(奉常寺) 첨정,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각각 역임하였다.
그런 가운데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하고, 이 직후 이영부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때 훈구파(勳舊派)의 남곤(南袞) 일파가 조광조(趙光祖) 등이 내세웠던 현량과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영부는 중종에게 “현량과가 비록 불공평하다고는 하지만, 만약 현량과를 혁파한다면 그 현령과 출신 사람들은 종신토록 금고(禁錮)를 당하는 것이니, 어찌 쓸 만한 사람들까지 모두 다 버리려고 합니까." 라며 적극 반대하다가 마침내 사직하기를 간청하였다.(『중종실록』 14년 12월 2일) 이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 전라도 임피에서 한동안 조용히 은거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어, 세자 인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겨우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중종실록』 18년 6월 19일)
성품과 일화
이영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격은 단정하고 중후하였다.
일을 할 때에는 함부로 넘기지 않고 반드시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여 처리하였다. 형관(刑官)이 되었을 때에는 송사(訟事)를 명백하고 자세하게 밝혀 조심성 있게 처리하면서, 한결같이 죄수를 용서하려고 노력하였다. 대관(臺官)이 되었을 때에는 논의를 굳세고 올바르게 주장해서, 대간(臺諫)의 풍모를 지키려고 힘썼다.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에는 절실하게 강론(講論)하여 이를 듣는 세자(世子 : 인종)가 특이하다고 여겼다. 밤낮으로 관직을 맡아 열심히 일하는 사이에 그 명성과 인망이 높아져서, 항상 청요직에 천거되어 좋은 관직에 등용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옥구(沃溝) 임피에 있었는데,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廣田里)로 옮겼으며, 정사룡(鄭士龍)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의영고(義盈庫) 영(令)인 이효완(李孝完)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수경(李首慶)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을 지냈고, 차남 이중경(李重慶)은 유생(儒生)이었으며, 3남 이복경(李復慶)은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하다가 일찍 죽었다. 딸은 생원(生員) 이자(李磁)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호음잡고(湖陰雜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학포집(學圃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