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純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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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611년(광해군 3) = 58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전라좌도 수사(水使)·포도대장(捕盜大將)·도총관(都摠管)이고, 봉작(封爵)은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 완천군(完川君)이고, 증직(贈職)은 우의정(右議政)이다. 자(字)는 입부(立夫)이고, 시호(諡號)는 무의(武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진(李眞)이고, 어머니 복주김씨(福州金氏)는 성균관 진사(進士) 김구수(金龜壽)의 딸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의 9대손이고,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의 제자이다.

임진왜란 때 방답진(防踏鎭) 첨사(僉使)로서 전라 좌수사(左水使)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 선봉장)이 되어 옥포(玉浦)·한산도(閑山島)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李舜臣)의 추천으로 경상 우수사(右水使)가 되었는데,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3도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유탄에 맞아 쓰러지자, 중위장(中衛將)으로서 3도 수군을 지휘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의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었고, 황해도 병마사 등을 거쳐 훈련대장(訓練大將)과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나, 서인 출신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고 여러 차례 파직되었다. 나중에 다시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은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처음에 방답진(防踏鎭) 첨사(僉使)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충무공이순신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무의공이순신이 ‘방답 첨사(防踏僉使)이순신(李純信)’, 또는 ‘방답 첨사(防踏僉使) 라고 기록되어있다.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가장 용감하게 활약한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은 충무공이순신과 한글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뛰어난 공로도 버금간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8년(선조 11) 알성(謁聖) 무과(武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방목] 선전관(宣傳官)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비변사(備邊司)의 낭관(郎官)으로 뽑혔다.[비문]

전라도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되었다가, 3년 만에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의 추천을 받아 함경도 온성부(穩城府)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유년기에 학봉김성일에게 학문을 수학하다가, 청년기에 무술을 배워 무과에 급제한 문무를 겸전한 무장이었다. 판관이순신은 온성부 판관에 부임한 후, 성의와 신의를 가지고 번호(藩胡) 추장들을 대접하자, 이들이 모두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때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된 김성일이 함경도를 순찰한 후, 온성 판관이순신(李純信)의 고과(考課)가 최상(最上)이라고 평가하자, 1588년(선조 21) 평안도 의주목(義州牧) 판관(判官)으로 영전되었다. 당시 평안도 의주는 중국 명나라로 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이들 사신(使臣) 일행은 의주를 지나면서 관부에 노자(路資)로 쓸 물품을 요구하였는데, 그 물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매매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판관이순신도 명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부터 엄청난 양의 노자 물품을 달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그는 노자돈만 마련해주고 더 이상 물품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신은 돌아 올 때, 기어이 다른 일을 가지고 무고(誣告)하려 하였으므로, 이순신은 스스로 판관 직을 사임하고 의주를 떠났다.[『목민심서』 예전 2조]

당시 북방 오랑캐가 두만강의 6진(鎭)을 침구(侵寇)하면서 북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이순신을 특별히 함경도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임명하였다. 이때 오랑캐의 공격으로 6진(鎭)이 대규모의 약탈을 당하자,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은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이순신(李純信)과 이억기(李億祺) 등 최 변방의 장수들에게 ‘적이 왔는데도 서로 구원하지 않았다’며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들의 죄를 감형하여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충군(充軍)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왜구(倭寇)를 방어하기 위하여 특별히 이순신을 서용하고 전라도 방답진(防踏鎭)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임명하였다.[비문] ‘방답 첨사가 된 이순신(李純信)’ 은 군사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며 병기를 수리하여 왜적(倭賊)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경상 우수사(右水使)원균(元均)은 왜군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여, 전라도 수군(水軍)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각 진(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포(唐浦)로 나갔는데,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았다. 중위장 이순신은 선단(船團)을 이끌고 옥포(玉浦)로 나가 왜적과 싸워 왜선 30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을 전부장(前部將: 선봉장)으로 삼아 선봉 부대를 이끌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였는데, 선봉 선단을 이끌고 사천(泗川)에 도착한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다시 왜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이끌고 당포(唐浦)에 도착한 후, 선봉장인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왜적을 기습 공격하여 왜선 20여 척을 모두 전소시켰다. 다시 선봉 부대를 이끌고 당항(唐項)에 도착한 이순신(李純信)은 왜군과 싸워 1백여 명을 격살하고, 왜장의 목을 베었다.[비문]

이어 견내량(見乃梁)에서 왜적을 만난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견내량의 지형이 싸우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왜적을 한산도(閑山島)까지 유인하여 70여 척의 왜선을 격파시켰다.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한 후, 왜적과의 싸움에서 역시 많은 왜군을 죽이고 왜선 42척을 불태워버렸다. 왜적이 모두 부산으로 철수하자,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선단(船團)을 이끌고 철수하는 왜군의 배를 뒤쫓았다. 이때 선봉 부대를 이끈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먼저 부산에 도착한 후, 왜적의 선봉 부대를 격파하였다. 뒤이어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본진의 선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하자,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과 함께 전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 앞 바다에서 왜선 1백여 척을 격파하였다.[비문]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선조에게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이 중위장(中衛將)과 전부장(前部將)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습니다.”라고 상소하니, 1594년(선조 27) 선조가 특별히 이순신(李純信)의 품계를 정3품상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시키고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충청도 수사(水使)로 부임한 이순신(李純信)은 그 휘하에 있는 각 진(鎭)의 절제사(節制使) 가운데 제때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논죄하다가, 사간원(司諫院)으로 부터“관리들에게 형률(刑律)을 지나치게 엄하게 시행하여, 원성을 듣고 있습니다.”라는 탄핵을 받고 체직(遞職)되었다. 이후 대간(臺諫)에서 서인 출신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아 1595년(선조 28) 평안도 우후(虞候)가 되었다가, 압록강 부근의 고령진(高嶺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에서 동인의 영수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의 추천을 받아 1596년(선조 29)서울의 유도(留都) 방호대장(防護大將)에 임명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의 서호(西湖: 마포 서강)에 주둔하며 서울을 방위하였다. 그 뒤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유정(劉綎)·양호(楊鎬) 등이 이끄는 육군과, 진린(陳璘) 등이 이끄는 수군(水軍)을 포함한 대규모의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3도 수군 통제사(水軍統制使)이순신(李舜臣)’은 원균(元均)의 무고(誣告)로 파직되어,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그해 2월, 이순신을 대신하여 원균이 3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원균은 3도의 수군을 이끌고 칠천량(漆川梁)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거의 모든 전함을 잃고 전라 우수사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남은 전함은 겨우 13척에 불과하였다. 그해 8월, 비변사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3도 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이순신(李純信)을 경상 우수사(右水使)에 임명하였다.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경상 우수사이순신(李純信)’을 다시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았다. 그해 9월,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과 ‘경상 우수사이순신(李純信)’은 남은 13척의 전함을 이끌고 명량(鳴梁)에서 왜적의 전함 133척을 상대하여 싸워서 그 중 31척을 격파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명량(鳴梁) 대첩(大捷)>이다.

1598년(선조 31) 1월, 도원수권율(權慄)과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연합하여, 왜장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 등이 웅거하고 있는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7월, 명나라 선단을 이끌고 온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이순신(李舜臣)의 3도 수군을 도와 왜적과 싸웠다. 그해 8월, 이순신(李純信)이 전라 좌수사로 전임되었는데,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病死)하여 왜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비밀리에 조정에 보고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20일) 그해 9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왜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웅거하고 있는 순천(順天)의 토루(土壘: 흙으로 쌓은 성)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이끌고 협공작전을 벌였는데, 해구(海口)에서 왜적의 배 5척을 불태웠다. 코니시 유키나카가 토루를 버리고 도망가자, 모든 왜적이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19일, 노량(露梁)에서 일본으로 퇴각하는 왜적의 전함 5백여 척을 발견한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이 먼저 왜적을 공격 하였는데,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선두(船頭)에서 지휘하다가 왜적이 쏜 총알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은 중위장(中衛將)으로서 3도 수군을 독려하여 노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은 선조에게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을 3도 수군통제사에 추천하였고, 비변사에서도 이순신(李純信)을 수군통제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반대하면서, 이순신(李純信)은 3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599년(선조 32)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에서 무고한 사람을 장살하였다고 탄핵하면서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 다시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남의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파직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다. 1602년(선조 35)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4년(선조 37) 중추부 첨지사(簽知事)가 되었다. 이때 <임진왜란> 당시 무공을 세운 18명을 뽑아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훈하였는데, 이순신은 3등에 책록되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1606년(선조 39) 다시 수원 부사가 되었고, 1607년(선조 40) 완천군(完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선조실록』 40년 9월 24일) 그 후,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었다가,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비문]

1608년(광해군 즉위년) 4월, 무신들 가운데 <임해군(臨海君) 옥사>에 연루된 자가 많았는데, 이순신(李純信)도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다. 그러나 대질(對質) 심문에서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풀려나 관직과 봉작(封爵)을 회복하였다.[비문] 이후, 이순신(李純信)은 벼슬에서 물러나서 한 동안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윤 3월,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광해군일기』 2년 윤3월 28일) 1611년(광해군 3) 9월, 전주의 병영(兵營)에서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 58세였다.[비문]

왜란 때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의 활동

일본의 다이쇼군[大將軍]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에 ‘중국 명(明)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황당한 요구하고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았다. 조선에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이에 선조는 훌륭한 장수를 뽑아 왜적(倭賊)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순신(李純信)을 특별히 전라도 방답진(防踏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하였다. ‘방답 첨사가 된 이순신(李純信)’은 군사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며, 병기를 수리하여 왜적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전라좌도 수군(水軍) 절도사(節度使)가 바로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이었는데,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은 이때부터 ‘전라 좌수사(左水使)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과 전부장(前部將: 선봉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므로, 충무공이순신(李舜臣)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무의공이순신(李純信)을 ‘방답 첨사(防踏僉使)이순신(李純信)’, 또는 ‘방답 첨사(防踏僉使)’라고 기록하였다.[『난중일기』]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30만 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15만 명을 대마도(對馬島)에 주둔시키고, 15만 명은 9부대로 나누어 한반도를 침략하도록 하였다. 그해 4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인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와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15만여 명의 왜군(倭軍)이 부산의 동래성(東萊城)을 함락시키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때 경상 우수사(右水使)원균(元均)과 좌수사박홍(朴泓)은 왜군의 갑작스런 침략에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군사들은 흩어져서 도망하였다. 이에 경상 우수사원균이 전라도 수군(水軍)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여러 진(鎭)의 장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해 5월,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각 진(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포(唐浦)로 나갔는데,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았다. ‘중위장 이순신(李純信)’은 선단(船團)을 이끌고, 옥포(玉浦)에서 고성(固城) 앞 바다를 지나며 왜적과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는데,[비문] 옥포(玉浦)의 싸움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였다.

왜적의 공격이 급박하다는 보고를 들은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을 전부장(前部將: 선봉장)으로 삼고, 방답 첨사에게 먼저 선봉 부대를 이끌고 출발하도록 하였다.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선봉 선단을 이끌고 사천(泗川)에 도착하니, 왜적이 이미 전함(戰艦)을 험준한 곳에 미리 정렬시켜 놓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우리 군사를 이끌고 거짓으로 후퇴하면서 그들을 유인하자, 유인책에 넘어간 왜적이 과연 우리 군사를 급하게 추격하였다. 이때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의 선봉 부대와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의 본진(本陣) 대군이 왜적을 협격(夾擊)하면서 왜선 13척을 대파시켰다. 그해 6월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이끌고 당포(唐浦)에 도착하였다. 왜적은 사기가 아주 높았으나, 선봉장인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왜적을 기습 공격하여, 왜선 20여 척을 모두 불태웠다. 선봉 부대를 이끌고 당항(唐項)을 도착한 이순신은 왜적의 수군에게 포위당하였으나, 본진의 대군과 합세하면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는 왜군을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요격하였는데,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거느린 선봉 군사가 왜적 1백여 명을 격살하고, 왜장(倭將)의 목을 베니,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비문]

이때부터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은 전부장(前部將)으로서 항상 전라도 수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이 바다에서 왜선을 찾아다니다가, 그해 7월, 견내량(見乃梁)에서 왜선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지세가 아주 싸우기에 불리하였으므로, 한산도(閑山島)까지 유인하여 전함 70여 척을 격파시켰다.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한 우리 군사가 왜적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왜적은 물이 얕은 해안에 버티면서, 우리 군사가 아무리 유인해도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李純信)’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살상된 왜적이 아주 많았다. 다급해진 왜적이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는데, 그들이 시체를 모아 쌓아올려 화장한 곳이 12군데나 되었다. 이에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선봉 부대를 이끌고 왜적이 버린 42척의 배를 모두 불태운 후, 왜군이 물러날 때 까지 기다리며, 바다의 길목을 지켰다.[비문]

왜장(倭將)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여러 지역에 있는 왜군들을 부산으로 소집하면서, 왜적이 모두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본진(本陣)의 선단(船團)을 이끌고 철수하는 왜군의 배를 뒤쫓았다.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선봉대를 이끌고, 화준(花遵)·다대(多大)·서평(西平)·절영(絶影)에서 왜선을 연달아 격파시키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해 9월, 선봉부대를 이끌고 부산에 도착한 ‘전부장 이순신(李純信)’은 왜적의 선봉 부대를 격파하였고, 뒤이어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본진의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하자, 사기가 꺾인 왜적은 왜군을 부산포로 후퇴시키고, 바다로 나와서 전라도 수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전라도 좌수사이순신(李舜臣)’과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이 이끄는 전라도 수군이 부산 앞 바다의 전투에서 왜선 1백여 척을 연달아 격파하고 왜적의 항로를 가로막았던 것이다.[비문]

1593년(선조 26) 8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코니시 유키나카가 강화(講和) 회담을 시작하자,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이때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道)를 총괄하는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신설하고,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에게 3도 수군통제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선조는 특별히 ‘방답 첨사이순신(李純信)’을 정3품상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陞品)시키고,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경상 우수사원균(元均)이 크게 반발하자,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사(兵馬使)로 전출시켰다가, 얼마 후, 전라 좌수사(左水使)에 임명하였다. ‘충청도 수사이순신(李純信)’은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의 통솔에 적극 순종(順從)하였으나, 전라 좌수사원균(元均)은 반발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講和) 회담이 성립되면서, 왜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황녀(皇女)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비(後妃)로 보내고, 한반도의 남부 4도를 일본에 준다는 등의 강화 조건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3년에 걸친 강화 교섭은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 당시 왜군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해안에 남아 있었는데,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蔚山)에 도산성(島山城)을 수축하고 웅거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원군을 파견하였는데, 유정(劉綎)·양호(楊鎬) 등이 남군(南軍)·북군(北軍)의 육군을, 진린(陳璘) 등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왔다. 그러나 ‘3도 수군 통제사(水軍統制使)이순신(李舜臣)’은 원균(元均)의 무고(誣告)를 당하여 파직된 후,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그해 2월, 전라 좌수사원균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3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수군통제사원균은 비변사의 명령에 따라 무리하게 3도의 수군을 이끌고 부산에 남아 있던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칠천량(漆川梁) 싸움에서 대패하여, 거의 모든 전함을 잃고 전라 우수사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남은 전함은 겨우 13척에 불과하였다.

그해 8월, 비변사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3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였는데, 이순신(李純信)을 경상 우수사(右水使)에 임명하여.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을 돕도록 하였다. 이에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경상 우수사이순신(李純信)’을 다시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았다. 그해 8월 15일,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과 ‘경상 우수사이순신(李純信)’은 겨우 남은 13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왜적의 전함 133척과 대결하여 31척을 쳐부수는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명량의 급한 물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였고, ‘경상 우수사이순신(李純信)’이 배를 이끌고 왜적의 전함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명량 대첩은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도 스스로 ‘천행(天幸)’이라고 말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였다.

1598년(선조 31) 1월, 도원수권율(權慄)과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연합군이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7월, 명나라의 선단을 이끌고 온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이순신의 3도 수군을 도와 왜적과 싸웠다. 그해 8월, 이순신(李純信)이 전라 좌수사로 전임되었는데,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病死)하였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조정에 보고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20일) 그해 9월, 왜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순천(順天)에 토루(土壘: 흙으로 쌓은 성)를 쌓고 웅거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순천 토루를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이끌고 가서 바다에서 순천 토루를 공격하였는데,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군사가 연합 작전을 벌여 해구(海口)를 막고, 왜적의 배 5척을 불태웠다. 이에 코니시 유키나카는 토루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모든 왜적이 일제히 퇴각하였다.

그해 11월, 왜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모두 철수하였는데,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과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은 노량(露梁)에서 철수하는 왜군과 마지막 결전(決戰)을 벌였다. 그해 11월 19일, 노량에서 일본으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백여 척의 왜적 전함을 발견하였다.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과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은 이 왜적과 싸우려고 하였으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싸움을 피하기 위하여 길을 터주려고 하였다.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은 도독 진린을 설득한 후,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에게 먼저 왜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함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왜군의 전함을 향하여 맹공을 퍼붓자, 많은 왜군 전함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화살과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지휘하던 ‘수군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왜적이 쏜 총알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아라.”하고 유언하였다. 이에 이순신(李舜臣)의 자제들은 ‘수군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돌아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은 오로지 중위장(中衛將)으로서 3도 수군을 독려하여 노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노량 대전의 승전보를 들은 선조는 ‘전라 좌수사이순신(李純信)’을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시켰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였으며, 믿음직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이 장수가 되어 변방에 근무할 때, 군사들을 간단명료하게 통솔하면서도 상벌은 반드시 원칙대로 미덥게 시행하였으며, 부하들을 너그럽게 대하였는데, 맨 아래 졸병이나 짐꾼들까지도 꼭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러므로 부하들이 그를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웠으므로,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였다. 성격이 곧아서 비굴하게 남을 섬기려 하지 않았고, 법을 어기거나 사정(私情)을 쓰는 사람을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비록 권귀(權貴)라고 하더라도 조금도 봐주지 않았으므로. 당로자(當路者)들이 대부분 그를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당로자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에서 끊임없이 그를 탄핵하면서 관직에서 거듭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순신(李純信)은 선조에게 신임을 얻어 임금의 은총을 받고 수사(水使)와 병사(兵使)에 발탁되었으며, 봉군(封君)의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이것은 모두 선조가 이순신을 너그럽게 봐주고 특별히 등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이순신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생각하였다.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은 ‘방답 첨사(防踏僉使)이순신(李純信)’을 칭찬하기를, “그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을 사람이다.”고 하였다.[비문]

함경도 육진(六鎭)에 부임한 수령관은 군사를 동원하여 번호(藩胡)의 침입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나, 번호(藩胡)의 오랑캐 추장들을 위무(慰撫)하는 것도 그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번호(藩胡)라는 말은 우리나라 영토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오랑캐’라는 뜻인데, 겉으로는 우리나라에 조공(朝貢)하고 복속(服屬)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기회만 있으면, 만주 내지(內地)의 오랑캐족과 우디케족과 연합하여 육진(六鎭)의 진보(鎭堡)를 침입하여 약탈하려고 하였다. 이에 육진(六鎭)에서는 변방 오랑캐의 대소 추장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하여, 해마다 이들을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본성이 거칠고 포악하여 술에 취하면 소란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는 일이 많았으므로, 잔치 때마다 추장들이 술을 절반 정도마시고 얼큰해 지기 시작하면, 곧바로 잔치를 중단하고 그들을 내쫓아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 때문에 번호(藩胡) 오랑캐 추장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은 육진(六鎭)가운데 가장 북단(北端)에 위치한 함경도 온성부(穩城府)의 판관(判官)으로 재임할 때, “이것은 성의와 신의로서 호인(胡人)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번호(藩胡)의 오랑캐 추장들에게 술을 실컷 마시도록 하니, 이들이 크게 만족하고 기뻐하면서 판관이순신에게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그의 명령대로 충실하게 복종하면서, 우리 변방을 침입하지 않았다.[비문]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은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과 전부장(前部將: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이 이순신(李純信)의 전공을 상신할 때마다 그를 미워하는 서인들이 중간에서 저지하는 바람에 ‘방답 첨사이순신’에게 포상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충무공이순신(李舜臣)은 선조에게 “이순신(李純信)이 힘을 다해 싸워서 자기가 거느린 군사만으로 적을 네 번이나 이겼는데도. 이것을 공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항(唐項)의 싸움에서 왜적 장수의 목을 베고 적진을 함락시켰으므로 공로가 가장 컸습니다. 여러 장수 중에서 자기 목숨을 내걸고 왜적과 싸운 자는 이 사람뿐이었는데, 이번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유독 이순신에게만 포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싸운 공로는 있는데 베푸는 포상은 없는 셈입니다.” 라며 ‘방답 첨사이순신’의 공로를 조목조목 나열하여 상소하니, 선조가 특별히 이순신(李純信)의 품계를 정3품상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올리고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하였다.

1604년(선조 37)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18명을 뽑아서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할 때,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이순신(李純信)은 3등 공신에도 끼지 못하였다. 선조는 <선무공신>을 선정한 영의정이항복(李恒福)에게 이를 질책하면서, 공신록(功臣錄)을 다시 고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李純信)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작호(爵號)를 하사 받고,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되어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이어 3대가 추은(推恩)받았는데, 증조부 이윤의(李允義)는 유제 도정(楡梯都正)에 추증되고, 할아버지 이귀달(李貴達)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추증되고, 아버지 이진(李眞)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무의공(武毅公)이순신(李純信)’의 무덤은 각형 호석을 두른 방형분인데, 지금 광명시 향토유적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조 때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경상도 병마우후(兵馬虞候)윤천수(尹天壽)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이탁(李王+乇)과 차남 이숙(李琡)은 모두 <이괄(李适)의 난(亂)> 때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훈되고, 장남 이탁은 완흥군(完興君)에, 차남 이숙은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는데, 두 사람 모두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이탁은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동생 이숙과 함께 군(軍)중에 있었는데, 동료 장수 이윤서(李胤緖)·유순무(柳舜懋)·이신(李愼) 등을 선동하여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한밤중에 적진을 습격하였다. 이 습격 사건으로 놀라 흩어져 고향 평안도로 돌아간 이괄의 반란군은 3천 명이나 되었다. 주력 부대를 잃은 평안도 병마사이괄은 그 다음날 길마재[鞍峴]에서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의 군사에게 대패하여 도망가다가 그의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는 이탁과 이숙의 용기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두 형제를 특별히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의 맨 앞줄에 책훈하도록 하였다. 손자 이광보(李光輔: 이숙의 아들)는 군수(郡守)를 지냈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언별집(記言別集)』
  • 『난중일기(亂中日記)』
  • 『임진장초(壬辰狀草)』
  • 『기언(記言)』
  • 『목민심서(牧民心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학봉전집(鶴峯全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난중잡록(亂中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