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공(李守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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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4년(세조 10)∼1504년(연산군 10) = 41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등을 지냈고,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자는 중평(仲平)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강원도 황간(黃澗)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이세충(李世忠)이며,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직장(直長)최표(崔豹)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李克培)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이다. 공조 좌랑(佐郞)을 지낸 이수겸(李守謙)의 동생이기도 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斬刑)을 받았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2년 뒤인 25세 때는 1488년(성종 19) 알성(謁聖)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다.(『성종실록』 19년 4월 26일),[『방목(榜目)』] 사축서(司畜署) 사축(司畜)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 1489년(성종 20)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1490년(성종 21) 외방(外方)에 있는 절의 사전(寺田)을 감축하여 향교(鄕校)에 급여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성종실록』 21년 1월 12일) 그 뒤 형조 좌랑 되었다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 1494년(성종 23)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이 되었다, 성종 말년에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과 봉상시(奉常寺) 첨정을 지냈다.

1496년(연산군 2)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홍문관 전한으로 승진하였으며,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사초(史草)로 인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이수공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로 장(杖) 1백 대를 맞은 후 평안도 창성(昌城)으로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1일),(『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그리고 1500년(연산군 6)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이듬해인 1501년(연산군 7) 유배에서 풀려났다.(『연산군일기』 6년 5월 7일),(『연산군일기』 7년 9월 23일)

그런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이수공의 화(禍)는 계속되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묘를 이장할 당시 이수공이 윤비의 묘를 이장하는 데에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28일) 이에 그는 그해 10월 28일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며, 향년이 41세였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28일)

이수공에 대한 신원은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1508년(중종 3)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이수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격이 과묵하고 도량이 컸다.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보통 때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정좌(正坐)하여, 비록 복중(伏中)의 더위라도 조금도 자세를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기쁘거나 노여운 일이 있어도 경솔하게 그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부모에게 지성으로 효도하고, 제사(祭祀)에는 예(禮)를 다하였다. 일찍이 시골에 있을 때 고을 수령이 전지(田地)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는 이를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남의 물건을 받아서 사사로이 선물로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며 사양하였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으니, 구차하게 남의 물건을 받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강원도 황간(黃澗) 동쪽 금화리(金化里)의 언덕에 있는데, 조신(曺伸)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1504년 이수공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형을 받고 죽었을 때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23년이 지난 1526년(중종 21) 1월 11일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이이진(李以震)이 어머니를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그 뒤에 이이진은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금화리로 부모님의 묘를 이장하고, 매부 김상(金祥)을 시켜 조신에게 비명을 부탁하여 부모의 무덤 옆에 비석을 세웠다.

부인 동래 정씨는 감찰(監察)정유지(鄭有智)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이진이고, 딸은 김상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허암유집(虛庵遺集)』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언(記言)』
  • 『미수기언(眉叟記言)』
  • 『일두집(一蠹集)』
  • 『한강집(寒岡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남계집(藍溪集)』
  • 『용재유고(慵齋遺稿)』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수헌집(睡軒集)』
  • 『망헌유고(忘軒遺稿)』
  • 『허암유집(虛庵遺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음애집(陰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