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필(李世弼)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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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세필 |
한글표제 | 이세필 |
한자표제 | 李世弼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현종~숙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군보(君輔) |
호 | 구천(龜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42년(인조 20) |
사망 | 1718년(숙종 44) 12월 6일 |
본관 | 경주(慶州) |
주거지 | 경기도 진위현(振威縣)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평택(平澤) 진위현(振威縣) 북쪽 언덕 |
증조부 | 이항복(李恒福) |
조부 | 이정남(李井男) |
부 | 이시술(李時術) |
모_외조 | 풍산 홍씨(豊山洪氏) : 홍영(洪霙)의 딸 |
형제 | (형)이세장(李世長) (동생)이세희(李世熙) |
처_장인 | 반남 박씨(潘南朴氏) : 박세모(朴世模)의 딸→(자녀)4남 3녀 |
자녀 | (1자)이태좌(李台佐) (2자)이정좌(李鼎佐) (3자)이형좌(李衡佐) (4자)이경좌(李景佐) (1녀)박항한(朴恒漢)의 처 (2녀)권섭(權燮)의 처 (3녀)원명귀(元命龜)의 처 |
저술문집 | 『동호예설(桐湖禮說)』, 『악원고사(樂院故事)』, 『구천유고(龜川遺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세필(李世弼)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 『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 『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 『숙종실록』 21년 7월 11일, 『숙종실록』 22년 6월 8일, 『숙종실록』 25년 5월 26일, 『숙종실록』 31년 9월 23일 |
총론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 77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장악원(掌樂院) 정(正)과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을 지냈다. 자는 군보(君輔)이고, 호는 구천(龜川)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진위현(振威縣)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이시술(李時術)이고, 어머니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예조 참판홍영(洪霙)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지낸 이정남(李井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항복(李恒福)이다. 이조 정랑(正郞)이세장(李世長)의 동생이기도 하며, 고모부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정지화(鄭知和)이다.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교유하였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74년(현종 15) 효종(孝宗)의 정비(正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생존해 있던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服喪) 문제로 일어난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삭직 당하자, 이세필은 유생으로서 그의 신원을 상소하다가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숙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
1678년(숙종 4) 사면되었는데, 이때부터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1년(숙종 7)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1684년(숙종 10) 형조 좌랑(佐郞)을 거쳐 용안현감(龍安縣監)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준수한 고을 자제들을 골라서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가르치고 매달 초하루마다 시강(試講)하는 등 학교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686년(숙종 12)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전임되었다가 1687년(숙종 13) 삭녕군수(朔寧郡守)로 승진하였는데, 이곳에서 모두 치적을 쌓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위패를 문묘(文廟)에서 축출하려고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되었고,(『숙종실록』 21년 7월 11일) 1695년(숙종 21)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거쳐 장악원 정에 임명되었다. 1696년(숙종 22) 서연관(書筵官)에 선출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숙종실록』 22년 6월 8일) 그 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제용감(濟用監) 정·양주목사(楊州牧使)·이천부사(利川府使)·연안부사(延安府使)에 임명되었으나 거의 부임하지 않았다. 1699년(숙종 25)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숙종실록』 25년 5월 26일) 1703년(숙종 29)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자, 서당을 창설하고, 학업을 독려하여 문풍(文風)을 일신시켰다. 1705년(숙종 31)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숙종실록』 31년 9월 23일)
1718년(숙종 44) 12월 6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7세였다. 예학(禮學)과 경설(經說)에 밝았다. 저술로는 『동호예설(桐湖禮說)』·『악원고사(樂院故事)』가 있고, 문집인 『구천유고(龜川遺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이세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온화하며 순수하였고, 풍모는 단아하며 중후하였다. 행동은 점잖고 차분하였으며, 겸양하고 공순하며, 점잖아서 표리(表裏)가 똑같았다. 행동이 느긋하여 스스로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였고, 과격하고 모난 행동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용서[恕]’의 마음가짐으로 남을 대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게 질책하였으나,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하였다. 다른 사람의 착한 점은 드러내어 주위에 알렸으나, 단점은 드러내어 말하기 싫어하였는데, 남이 심각하고 모진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거처하는 것과 음식은 모자라지 않을 정도만 하도록 하였으므로, 비록 젊은 부녀일지라도 그를 만나 뵐 때에는 화려하고 눈부신 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의 학문적 경향은 세밀하게 사색 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고, 실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궁구(窮究)해야 할 것이 생기면, 그 정조(精粗) 본말(本末)과 거세(巨細) 곡절(曲折)을 이해하여 사색하고 또 사색함으로써 철저하게 분석한 후라야 그만두었다. 그는 항상 “나는 궁리(窮理)하고 격치(格致)하는 일에 대하여 늘 피를 흘리며 싸우듯이 공부를 한다. 배움이라는 것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고서 단지 옛사람의 이야기에만 의존하면 끝내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년 이후로는 예학에 더욱 공력을 들였는데, 평생 동안 저술은 일삼지 않았고, 특히 시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경설(經說)에 대하여 논변(論辯)한 것과 의례(疑禮)에 대하여 문답한 것이 20여 권이 있다.
그는 식견이 깊고 영특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세밀하였는데, 젊은 시절부터 의리(義理)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밖으로는 너그럽고 부드럽게 보였으나 내면은 실로 강직하고 공정하였다. 그는 “나는 곧 일개 음관(蔭官)일 뿐이다. 내 분수에 걸맞지 않는 관질(官秩)은 외람되게 받들 수 없다. 다만 대대로 나라의 국록을 받아온 신하로서 의리상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벼슬에 나서는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담담하였으며, 내직이나 높은 관직을 사양하였다. 남들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정의(情誼)를 다하였으며, 한결같이 성의(誠意)를 가지고 깐깐하게 충고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2차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이 남인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자, 유생으로서 송시열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이세필을 영광으로 유배하고, 여기에 참여한 유생들을 모두 정거 처분하도록 하였다. 그는 유배 생활을 한 지 5년이 되도록 문 밖을 벗어나지 않고 근신하며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길어지면서, 살림이 곤궁해져 간혹 끼니조차 바닥나기도 하였다. 이에 호남의 선비들이 재화와 곡식을 출연(出捐)해서 상조(相助)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고, 선물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나 매우 엄격하게 처신하여 털끝 하나도 구차스럽게 받지 않았다. 고모부인 형조 판서정지화가 그 소문을 듣고 “자네의 사수(辭受 : 남이 주는 것을 사양하거나 받아들이는 일)는 그야말로 분명하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平澤) 진위현(振威縣) 북쪽 언덕에 있는데, 윤순(尹淳)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전라북도 김제(金堤)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예조 참판박세모(朴世模)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태좌(李台佐)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을 지냈고, 차남 이정좌(李鼎佐)는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냈으며, 3남 이형좌(李衡佐)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4남 이경좌(李景佐)는 윤증(尹拯)의 문인인데 요절하였다. 장녀는 영은군(靈恩君)박항한(朴恒漢)에게, 차녀는 학유(學儒) 권섭(權燮)에게, 막내딸은 부사(府使)원명귀(元命龜)에게 각각 시집갔다. 병조 판서를 지낸 외손자 박문수(朴文秀)는 숙종 때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유명하였는데, 장녀와 박항안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구천유고(龜川遺稿)』
- 『농암집(農巖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후광세첩(厚光世牒)』
- 『서계집(西溪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수재집(寒水齋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후재집(厚齋集)』
- 『겸재집(謙齋集)』
- 『오천집(梧川集)』
- 『하곡집(霞谷集)』
- 『지촌집(芝村集)』
- 『양와집(養窩集)』
- 『귀록집(歸鹿集)』
- 『종묘의궤(宗廟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