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李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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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3년(선조 36)∼1685년(숙종11) = 83세]. 조선 중기 선조~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참판(戶曹參判)·좌승지(左承旨)이고,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자(字)는 백이(白而)이고, 호(號)는 옥산(玉山)·서은(鋤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파흥군(坡興君)이응순(李應順)이고, 어머니 목천상씨(木川尙氏)는 판관(判官)상기손(尙耆孫)의 딸이다. 성종의 서출 제 7왕자 익양군(益陽君)이회(李懷)의 현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이증(李曾)의 형이다. 창랑(滄浪)성문준(成文濬)과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서(魯西)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와 부익자(孚翼子)정양(鄭瀁: 정철의 손자)과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청요직(淸要職)을 두로 거쳤고, 효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으로서 지평(持平)김홍욱(金弘郁)과 함께 영의정김자점(金自點)과 숙빈(叔嬪) 조씨(趙氏)를 제일 먼저 탄핵하여, 김자점 일당이 몰락하는 <김자점 옥사>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효종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승지로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北伐) 계획>을 수립하였고, 병조참지(兵曹參知)로서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실무를 도맡아 추진하였다. 현종 때 노론의 송시열·송준길과 뜻이 맞지 않아서 <제 1차 예송(禮訟)> 때에는 강원도 낭천(狼川) 서은동(鋤隱洞)으로 은거하였고, <제 2차 예송(禮訟)> 때에는 경기 안산(安山) 선영 아래에 은거하였다. 동생 사헌부 장령(掌令)이증(李曾)이 사람을 국문(鞠問)하다가 죽인 혐의를 받고 의금부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형 이석이 동생 이증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낼 때, 그 명정(銘旌)에 동생의 당시 관직인 ‘사헌부 장령’을 썼다는 이유로 이석은 관료로서 ‘길이 서용하지 않는 형벌’을 받았는데, 현종·숙종 때 폐기(廢棄)된 상태로 지내다가, 불우하게 생을 마쳤다.

인조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634년(인조 12)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깊은 산골로 피난하였다.

1637년(인조 15)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가, 승륙(陞六)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1638년(인조 16) 평안도 은산 현감(殷山縣監)으로 나갔는데, 당시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민생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현감이석은 유민(流民)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세금을 경감시켜 많은 백성들을 구제시켰다. 1640년(인조 18) 현감의 임기를 채우고 조정으로 돌아올 때,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다시 예조와 병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641년(인조 19)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5월에 그가 “당상 선전관황익(黃瀷)은 집안에서 행실이 패려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손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지 않으니, 조정을 부끄럽게 하고 명기(名器)를 욕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고 무신 황익을 탄핵하자, 인조가 황익을 체직시켰다.(『인조실록』 19년 5월 21일)

1643년(인조 21) 여름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에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경상도 지방의 재해 상황을 순찰하였다. 1644년(인조 22) 평안도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와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에 임명되었는데, 실록청과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645년(인조 23) 다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어,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으며, 곧 이어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전임되었다. 1646년(인조 24)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가 되었고,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 2월,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27년 2월 27일],[비문]

효종 시대 활동

1649년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였다. 인조 말년에 인조의 총애를 받았던 숙원(淑媛) 조씨(趙氏)는 김자점과 손을 잡고 <강빈(姜嬪) 옥사>를 일으켜 강빈(姜嬪: 소현세자 빈)을 죽이고 그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며, 인조를 움직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世子)로 삼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종이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 학자들을 초빙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자,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은 이에 반대하며, 서인 학자들과 대립하였다. 이때 사헌부 장령이석이 사헌부 집의(執義)김홍욱(金弘郁)과 함께 가장 먼저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의 죄를 탄핵하였고, 뒤이어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에서 영의정김자점과 숙원 조씨의 죄상을 파헤쳐서 모두 귀양 보냈다. 사헌부 장령이석과 사헌부 집의김홍욱의 탄핵은 <김자점 옥사>가 일어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결국 효종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부터 효종은 이석과 김홍욱을 아주 신임하였다. 그해 겨울에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는데, 이조 판서심액(沈詻)이 인사(人事)에 사정을 둔다고 논박하였다. 그해 겨울에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그 사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는데, 효종은 그를 곧 바로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하였다.[비문]

1650년(효종 1)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광주 부사(廣州(府使)기진흥(奇震興)의 죄상을 논핵(論劾)하여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였다. 당시 홍천(洪川)에 유배된 김자점은 몰래 청나라에 자신의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서 “새 왕이 구신(舊臣)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고발하였으며, 광주 부사기진흥과 수원 부사변사기(邊士紀)를 동원하여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이 광주수어청(守禦廳) 군사와 수원 군사를 거사에 동원하여 인조의 서출 제 1왕자 숭선군(崇善君: 숙빈 조씨의 아들)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다며 고발당하였는데, 이때 김자점 부자와 기진흥·변사기 등이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1651년(효종 2)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는데,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당시 실록청(實錄廳)에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였는데, 그는 편수관으로서 밤에는 시강원에서 숙직하고 낮에는 춘추관에 출사(出仕)하였다. 그해 여름에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사직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다.[비문] 1652년(효종 3)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가,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전임되었다.[비문] 1653년(효종 4)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승진하여,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으며, 다시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다.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겨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비문] 선영(先塋)에서 동생 이증(李曾) 등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54년(효종 5) 감사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을 신원(伸寃)시켜 주도록 효종에게 호소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효종은 일찍이 <강빈(姜嬪) 옥사>에 대하여 누구도 언급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1656년(효종 7)1월에 상기(喪期)를 끝마친 후, 다시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차례대로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우승지(右承旨)까지 올랐다. 그러나 우승지이석이 번다한 왕명 출납(出納)과 효종의 독촉으로 몹시 지쳐서 힘들어 하자, 어떤 친구가 사직할 것을 권하였다. 이때 이석은 정색을 하며 “외람되게 임금의 은총을 입고서 털끝만큼도 보답을 못 하고 있으니, 오직 힘을 다하여 뛰어다녀서 만 분의 일이라도 그 은총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섯 달 동안 승지로 봉직하다가, 그해 10월,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청나라로부터 의례적으로 받은 선물과 화폐는 모두 군관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그의 행장은 텅 비어 있었다.[비문]

1657년(효종 8) 중추부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가,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는데, 효종의 <북벌(北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의 양성과 군비 증강을 도맡아서 독려하였다. 다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불같은 성화를 이기지 못하여 그해 6월에 사직하고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 아마도 <북벌 계획>을 둘러싸고 송시열·송준길 등과의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여주 고을의 무당들이 강가에서 굿을 하고 음사(淫祀)를 지내곤 했는데, 여주목사이석이 무당 한 사람을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죽이자, 그 폐단이 없어졌다. 1658년(효종 9) 여름에 여주 목사를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올 때, 행로에서 먹을 쌀 일곱 말[斗]만을 싣고 왔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1659년(효종 10)이석의 중간 아우인 사헌부 장령(掌令)이증(李曾)이 죄인을 심문하다가 사람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의금부에 잡혀갔는데, 국문(鞠問)을 받다가 결국 형장(刑杖)을 맞고 죽었다. 이때 그가 아우 이증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면서, 아우의 명정(銘旌)에 사헌부 장령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썼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다. 이때 효종은 이석을 ‘벼슬에 서용하는 것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으므로, 이석은 이후 조정에서 벼슬할 수가 없게 되었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효종이 돌아가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기년복(朞年服: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과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 등의 삼년복(三年服: 3년 상복)의 주장이 크게 대립하였는데, 나약한 현종은 서인 송시열이 주장하는 기년복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남인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 갔으며,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이 축출되었다. 당시 송시열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가운데 한 사람이 윤휴였는데, 이석과 가까운 윤선거(尹宣擧)가 윤휴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석은 당파 싸움을 피하여 강원도 화천군 낭천(狼川) 서은동(鋤隱洞)으로 이사한 후, 한평생 낭천에서 농사를 짓고 숨어서 살아갈 생각으로, 스스로 호(號)를 ‘서은(鋤隱)’이라고 하였다. 이석은 8년 동안 이곳에서 산촌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간혹 태백산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소요(逍遙)하고 자적(自適)하였다.[비문] 1666년(현종 7) 영의정홍명하(洪命夏)와 이조 판서박장원(朴長遠)이 현종에게 이석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아뢰었고, 현종이 이석을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마침내 벼슬길이 열리게 되었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1667년(현종 8) 강원도 홍천 목사(洪川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오랫동안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반년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668년(현종 9)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으나, 또 한 해가 채 못 되어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674년(현종 15)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로 전임되었다. 그때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돌아가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가 또 큰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서인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은 대공복(大功服: 8개월 상복)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은 기년복(朞年服: 1년 상복)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이 남인이 주장한 기년복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다. 이때 이석은 서인 송시열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남인 허적의 주장도 지지하지 않았는데, 결국 벼슬을 그만두고 경기 안산(安山)의 선영(先塋) 아래로 옮겨가서 우거(寓居)하였다.

1675년(숙종 1)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의 국장(國葬)때 이석은 안산에 머물고 있었으나, 아무리 날씨가 무덥거나 추워도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빠짐없이 서울 도성 안으로 들어가 궁궐의 제전(祭奠)에 참석하였다. 1677년(숙종 3)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정권을 잡은 남인(南人)들의 탄핵을 받아 사임하였다. 1678년(숙종 4) 나라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와 싸운 사람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었는데, 숙종이 특별히 76세의 이석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승품(陞品)시키고, 1679년(숙종 5)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하였다. 1680년(숙종 6)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발탁되었다. 그해 10월에 성변(星變)이 생기자 숙종은 2품 이상의 대신(大臣)들에게 구언(求言)하였는데, 호조 참판이석이 억울한 옥사(獄事)를 신원해 주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호해 줄 방도를 조목 별로 논하여 상소하니, 숙종이 가납(嘉納)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사임하고, 안산의 임시 거소(居所)로 돌아왔다.[비문]

1682년(숙종 8) 조정의 대신들이 이석의 나이가 여든 살이라고 임금에게 아뢰고, 나라에서 은전(恩典)을 베풀기를 청하자, 숙종이 이석을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진시키고, 돈녕부 지사(知事)에 임명하였다. 이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3년(숙종 9) 겨울에 현종의 왕비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우명의 딸)가 승하하자, 대궐로 들어가서 곡반(哭班)에 참석하고, 발인할 때 동대문 밖까지 나가서 지송(祗送)하였는데, 그는 본인이 늙었다고 하여 예절에 참여하는 횟수를 줄이지 않았다.[비문] 1684년(숙종 10) 겨울에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 대비(壯烈大妃: 자의 대비)의 환갑을 맞아, 나라에서 인조 때의 시종신(侍從臣)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었는데, 숙종은 82세의 이석을 정2품상 정헌대부(靖憲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1685년(숙종 11) 1월 10일, 노병으로 서울 집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83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우직하였다. 남에게 영합하려고 구차스럽게 말하지도 않았고,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구차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남에게 자기 뜻을 굽히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에 들어간 지 수십 년 동안 당로자(當路者)에게 한 번도 청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한 번의 실수로 폐치(廢置)된 이후에 다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고 일생토록 험난한 길을 걷게 된 까닭이었다.[비문]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에게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복 입는 예절을 성인(成人)처럼 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나이 이미 5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아무리 큰비와 폭설이 와도 빼놓지 않고 무덤을 찾아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그는 제사 그릇[器皿]에서 비린내나 양념 냄새가 조금만 나도 당장 물리쳤으므로, 제사 때마다 온 집안사람들이 긴장하여, 감히 겨자나 생강 같은 입맛을 돋우는 양념을 쓰지 못 하였다.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도 한결같이 정갈하게 하였고, 담제를 지낸 달이 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평소에 먹던 반찬을 먹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조차 이석처럼 제사 때마다 정갈하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비문]

1650년(효종 1)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을 때, 특진관으로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다가, 궁가(宮家)에서 산택(山澤)을 불법으로 점거한 데에 따른 폐단을 논하니, 효종이 그 자리에서 “나의 이목(耳目)이 밝지 못한 탓이다.” 하고 자책(自責)하였다. 이때 그는 “임금은 비유하자면 머리이고, 신하는 비유하자면, 이목(耳目)입니다. 이목(耳目)의 총명도 또한 머리에 달려 있는데, 오늘날 경연에서 이목(耳目)을 제대로 소양하지 못하면서, 이목이 총명해지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어찌 귀를 막고서 귀가 밝기를 바라고, 눈을 가리고서 눈이 밝기를 바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하고 시정(時政)의 잘잘못 뿐 아니라 임금의 정사까지 언급하였다. 이때 효종은 이석의 직언(直言)에 놀라워하며, 가납(嘉納)하였으며, 이어 “집의이석은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드러내 말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호피(虎皮) 한 벌을 내려주어 그의 충직함을 알리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석이 호피를 사양하자, 효종은 “그대의 충직함이 이미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는데, 포상하는 은전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비문]

1650년(효종 1)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할 당시, 이석은 광주 부사(廣州(府使)기진흥(奇震興)의 죄상을 논핵(論劾)하여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이석과 기진흥은 과거에 함께 합격한 동방(同榜)이었다. 처음에 과거의 급제자를 발표하고 임금이 어사화(御史花)를 내려 주던 날, 기진흥은 어사화를 개조하여 오색 비단줄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을 본 이석이 동방의 친구들에게 “기진흥은 뒷날에 반드시 나쁜 마음을 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비문] 동방의 친구들은 대개 계(契)까지 만들어 친숙하게 지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당파가 달랐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던 것 같다. 기진흥은 이후 <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초기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이석은 <북벌(北伐) 계획>의 실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1651년(효종 2) 그가 홍문관 교리(校理)였을 때, 어느 날 야대(夜對)에서 <북벌 계획>을 논의하다가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석은 효종이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많이 취하게 되었는데, 그가 편전(便殿)을 나올 때 비틀거리자, 효종은 소환(小宦: 어린 내시)에게 특별히 이석을 부축하도록 하였으며, 한 밤중이 되자 해장술[解酲酒] 한 병을 이석에게 내려 보냈는데, 당시 모든 관료들이 남다른 은수(恩數)라고 하며, 그를 부러워하였다.[비문]

1659년(효종 10) 이석의 중간 아우인 사헌부 장령이증(李曾)이 죄인을 국문(鞠問)할 때, 사람을 묶어서 물속에 넣어 고문하다가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는데, 그 일로 관가에 잡혀가서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13권] 이석은 아우 이증이 그 혐의를 승복하지 않은 채 죽었고, 또 조정에서 이증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므로, 아우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아우의 명정(銘旌)에 당시 관작(官爵)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형 이석의 행위를 탄핵하자, 효종은 이석에게 벼슬에 임명하는 것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으므로, 그 후 이석은 조정에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5월에 효종이 승하하였는데, 이석은 과거 효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일을 되새기며, 온 종일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졸곡(卒哭)할 때까지 소식(素食)을 하였다.[비문]

아우 이증이 비명에 일찍 죽은 것을 비통하게 여긴 이석은 아우를 장사지낼 때, 여러 가지 물품을 모두 손수 챙겨서 장례를 치렀다. 이석은 아우의 아들인 이상일(李相一)이 상례를 치르다가 중병을 얻게 되자, 의원을 데려다가 치료하였을 뿐 아니라, 친자식처럼 직접 간호하였는데, 아파서 누웠던 조카 이상일이 마침내 아홉 달 만에 완쾌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본인이 죽기 바로 한 해 전에 막내아우 이로(李魯)의 상을 당하였는데, 밤낮으로 아우의 시신 곁을 지키면서 장례 물품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았으며, 발인하는 날에는 친히 제사를 지내고 전(奠)을 드리기까지 하였다. 서출 아우와 서출 누이도 지성으로 돌보아 주었고, 또 여러 아우의 딸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길러서 혼수를 갖추어 시집을 보냈다. 친구와 사귈 때에는 신의를 굳게 지켰으므로, 친구 몇 사람과는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교유하며 서로 어울려 지냈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묘소는 경기 안산(安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이석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마찬가지로 서인이었지만,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항상 대립하다가, 두 사람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 불우하게 지냈는데, 윤증이 그 비문을 지었다.

첫째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승지(承旨)이직(李稙)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둘째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첨지(僉知)남두명(南斗明)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장남 이우성(李牛星)은 다섯 살 때 죽었고, 차남 이상기(李相夔)는 노서(魯西)윤선거(尹宣擧)의 문인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까지 지냈다. 그러나 성질이 강직하고 품행이 독실하여, 아버지 이석이 숙부 이증(李曾) 때문에 폐치(廢置)된 것을 보고 관직을 사임하고, 다시는 벼슬살이 하지 않았다. 손자 이민호(李敏好)는 명재(明齋)윤증(尹拯)의 제자로서,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군수(郡守) 등을 지냈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각사등록(各司謄錄)』
  • 『기언(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