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안(李尙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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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627년(인조 5) = 5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무신.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지냈고,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증직되었다. 자는 정이(靜而)이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양부는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지낸 이광국(李匡國)이고, 양모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충의위(忠義衛)한개(韓蓋)의 딸이다. 생부는 충의위(忠義衛)이광록(李匡祿)이고, 생모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사인(士人) 권적(權適)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낸 이맹창(李孟昌)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낸 이수진(李秀蓁)이다. 좌찬성(左贊成)이극돈(李克墩)의 5세손이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세정(李世貞)의 현손이기도 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도 병마사(平安道兵馬使)남이흥(南以興)의 별장(別將)이 되어, 평안도 안주성(安州城)을 지키고자 후금(後金)의 아민(阿敏)이 거느린 3만 명의 오랑캐 대군과 싸우다가 안주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3년(선조 36) 식년(式年)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1604년(선조 37)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606년(선조 39)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선전관이 되었으나, 1611년(광해군 3)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다가 상례가 끝난 1610년(광해군 2) 훈련원(訓練院) 습독(習讀)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갔으나 얼마 뒤 병에 걸려 사직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공산군수(公山郡守)로 옮겨서 임명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옮겨서 임명되었는데, 서북 변방이 오랑캐와 충돌이 많았으므로 무장(武將)을 골라서 임명한 것이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17일),(『광해군일기』 10년 6월 18일),(『광해군일기』 10년 6월 23일) 그는 평안도 가산군에 부임하여 해묵은 폐단을 없애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임기가 차서 가산군을 떠날 때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의 치적을 추모하였다.

1623년(인조 1)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陞品)되어 평안도 창주첨사(昌州僉使)가 되었으며 치적을 인정받아 여러 번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이어 서북 변방에 후금 오랑캐의 침범이 잦아지자 조정에서 평안도 지방의 고을 수령관을 모두 무관으로 교체하였고, 이에 이상안은 1624년(인조 2)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옮겨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밤낮으로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를 점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전들을 독려하여 장부를 정리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장부의 기록대로 정확하게 군졸들에게 군량미를 지급하니 백성들이 공평하다고 칭송하였다.

그런 가운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가 후금을 배척하는 ‘배금(排金) 정책’을 취하자, 후금의 칸[임금] 홍타지는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애고자, 아민에게 3만의 오랑캐 기병을 거느리고 조선을 정벌하게 하였다, 1월 13일 후금의 오랑캐 군사는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용천(龍川)·선천(宣川)을 점령한 후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리고 1월 21일 안주(安州)를 공격하였는데, 평안도병마사남이흥과 안주목사(安州牧使)김준(金浚)은 강계부사이상인 등 주변의 여러 고을의 수령관들에게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성에 집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중군⋅좌군⋅우군의 편제로 편성하여 오랑캐 군사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오랑캐 군사를 막지 못하는 바람에 마침내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되어 모두 순사(殉死)하였다. 이때 강개부사이상인은 별장이 되어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평안도병마사남이흥이 성위에서 화약을 폭발시키고 불에 뛰어들어 죽었고, 별장이상인도 뒤따라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어 그의 편장(褊將)⋅비장(裨將)과 노복(奴僕)들도 모두 이상안을 뒤따라서 죽는 바람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다.(『인조실록』 5년 2월 4일)

후금의 오랑캐 군사들이 물러간 다음 가족들이 이상안의 시신을 찾았으나, 성안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타버리고 시설물들이 모조리 파괴되는 바람에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성위로 올라가서 평상시 입던 의복을 가지고 초혼(招魂)을 한 후 신주를 모시고 광주(廣州)의 선산(先山)으로 돌아와서 묻었다. 그때 이상안의 나이가 53세였으며, 안주성이 함락당한 날이 1월 21일이었으므로, 이날을 기일(忌日)로 삼았다.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의 싸움

1616년(광해군 8)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明)나라와 싸울 때 광해군(光海君)은 중립을 지키며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데 1619년(광해군 11) 명나라 경략(經略)양호(楊鎬)가 군사 10만여 명을 거느리고 4로(路)로 나누어 누르하치 본거지 헤투알라[興京老城]를 정벌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도원수(都元帥)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명나라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전세가 불리하면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도록 명하였다. 명나라의 군사는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건국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강홍립은 만주의 부차(富車)에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면서 후금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親明) 배금(排金)’ 정책을 취하였다. 이에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칸[임금]에 즉위한 홍타이지[청나라 태종]는 명나라를 돕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서 반란군이 서울까지 점령한 끝에 반란을 주도하던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은 세상을 떠났고, 그 잔당은 만주의 후금으로 도망을 쳐서 후금의 칸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정벌하도록 책동하였다.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당장 명나라와 싸우는 데 필요한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을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그의 4촌인 아민에게 3만 명의 8기병(旗兵)을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게 하고, 그의 둘째형 귀영개(貴英介)에게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이때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등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후금의향도(嚮導 : 길을 안내하는 자)가 되어 후금의 오랑캐 군사와 함께 왔다. 그 밖에도 이괄의 잔당으로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강홍립의 휘하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오랑캐의 통역이 되어 오랑캐 군사를 따라왔다.

이보다 앞서 평안도병마사남이흥은 강개부사이상안을 막부(幕府)의 별장으로 발탁하는 등 오랑캐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한 서북 지방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의 요충지는 의주(義州)·영변(寧邊)·안주 등지인데, 영변에는 평안도병마사남이흥의 병영(兵營)이 있었고, 의주와 안주에는 의주부사(義州府使)이완(李莞)과 안주목사김준이 각각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점검하였다.1627년(인조 5) 1월 13일 오랑캐 기병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몰래 건너 밤중에 의주성(義州城)을 습격하였다. 아민이 먼저 조선의 통역관을 시켜 남산(南山)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기를, “대금국(大金國)의 제 2왕(王) 귀영개가 칸의 명을 받들어 너희를 정벌하니, 성안의 장수와 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나와서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말발굽으로 짓밟아 모두 죽여서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의주부윤이완이 마침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었으므로,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로 의주성은 오랑캐 군사에게 점령당하였다. 이때 의주부윤이완과 성안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5]

이런 가운데 평안도병마사남이흥은 평안도 안주성이 오랑캐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요충지라고 생각하여, 각 고을에 파발문을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안주성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이흥과 별장이상안은 병영에 소속된 군사 3백 명을 인솔하고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안주목사김준은 호패를 지닌 백성들을 모두 군사로 징발한 다음에 남이흥과 힘을 합하여 안주성을 지키고자 하였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12] 또 개천군수(价川郡守)전상의(全尙毅), 증산현령(甑山縣令)장돈(張暾), 태천현감(泰川縣監)김양언(金良彦), 맹산현감(孟山縣監)송덕영(宋德英), 영유현령(永柔縣令)송도남(宋圖南) 등 여러 고을의 수령들도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이때 남이흥이 문관 출신 영유현령송도남에게 문관 서생(書生)이라면서 돌아가기를 권하니, 송도남이 분연히 나서며 “국난(國難)을 맞아서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어찌 무관(武官)만의 일이겠습니까.” 하고, 격문(檄文)을 지어 오랑캐가 내침(來侵)한 죄를 성토하였다.[『속잡록(續雜錄)』 권3]

1월 20일에 오랑캐 3만여 명의 기병이 안주성 아래에 이르러 성에서 수백 보 거리에 진을 치고 성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외쳤다. 이보다 앞서 성 안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의논하여 성 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는데, 이때 적병이 말하기를, “사람의 집이란 지극히 귀중한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불태웠는가.” 하였다. 성 안에서 군관을 시켜 성문을 나가 적의 사정을 탐문해 오도록 하였는데, 군관이 가서 보니, 귀영개와 아민 두 사람이 강홍립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었고, 박난영 등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민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무엇 때문에 호패를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히며, 이웃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를 닦지 않는가. 어서 빨리 나와서 항복하고 화친하기를 약속하라.” 하고, 술 석 잔을 먹이고 돌려보냈다.[『속잡록』 권3]

적병이 안주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글을 보내 강화(講和)하도록 위협하는 한편, 강홍립은 거느린 항장(降將 :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장수) 박난영과 오신남(吳信男) 등을 보내 주장(主將)이 성을 나와서 그들을 영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김준이 불응하고 성 위에 올라가 배척하며 욕설을 퍼붓자, 강홍립이 크게 성을 내며 급하게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택당집』 별집 권12] 이때 항장 한 사람이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꾸짖기를, “강 원수(강홍립)가 이미 너희들의 주인이 되었다. 따라서 너희들이 대포를 쏘고 화살을 발사한다면, 뒤에 가서 멸족을 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성 위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목사김준은 팔뚝을 걷어붙이며 말하기를, “군부(君父 : 인조)께서 우리들에게 작록(爵祿)을 주고 간성(干城)의 직책을 맡겨 주었으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자기 한 몸을 나라에 바쳐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모두 구차하게 살려는 마음을 갖는가.” 하였다. 그리고 곧 통역관을 성 위로 올려 보내, “우리는 다만 싸우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 밖에 알지 못한다.”고 외치게 하니, 항장이 말하기를, “내일 너희들을 도륙할 터이니, 후회하지 말라.” 하였다.[『연려실기술』 권25]

다음 날 1월 21일 새벽 연기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병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기병 3만여 명이 한꺼번에 쳐들어왔다. 성 안에서 대포와 화살을 함께 쏘자 적병 가운데 말에서 참호로 굴러 떨어져 죽는 자가 산처럼 쌓였다. 앞에서 엎어지면 뒤에서 짓밟고 쳐들어 와서 좌충우돌하고, 낙타까지 말과 아울러 달리면서 적병이 긴 사닥다리를 운반하여 온 후 일시에 사다리를 타고 성위에 올라와서 칼날로 육박전을 벌였다. 그리고 곧 적병이 마침내 성 안으로 뒤쫓아 들어와서 성안의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남이흥과 김준은 손에 화약 포대를 들고 성루에 기대어 서서 어지럽게 화살을 쏘았으나, 적의 무리가 한꺼번에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이들이 드디어 화약 포대에 불을 지르니, 화약이 폭발하면서 집채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남이흥과 김준 부자, 이상안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으며, 적병들도 가까이 있다가 불에 타서 죽은 자가 많았다. 이 가운데 영유현령송도남은 적병이 안주성에 닥치자, 쇠갑옷[鐵衣]을 벗어서 나무에 걸고, “성이 함락될 터인데 몸을 보호해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온몸이 벌집처럼 되어 죽었다.[『속잡록』 권3]

이어 적병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였으며, 수색 끝에 잡은 수백 명은 진영 앞에서 죽이려고 하다가 마침 원수부(元帥府)에서 서로 화친했다는 글이 도착하는 바람에 풀어 주었다. 여러 수령관들은 모두 폭사(暴死)하였으나, 목사김준만이 뼈와 살갗이 아직 온전하였으므로, 적병이 물러가고 난 다음에 고을 백성들이 김준의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장사지냈다. 그러나 이상안을 비롯한 수령관들은 폭사할 때 뼈와 살갗이 모두 날아 가버려 시체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때 인조가 보낸 선전관이 어명을 받들고 와서 안주성 안에 있었는데, 남이흥이 말하기를, “어명을 받든 사람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먼저 성을 빠져나가게 하였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인조에게 글을 올리기를, “외로운 성이 포위를 당하여 장차 성을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윤훤(尹暄)은 군사를 거느리고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으니, 신 등은 오로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권25]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정묘호란 때 후금의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므로, 시신을 찾을 수가 없어 의관을 광주 선산(先山)에 묻었다. 현재 무덤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下大院洞) 일대의 광주 이씨(廣州李氏) 묘역에 있는데,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안도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충민사는 1681년(숙종 7) 안주의 유림(儒林)들이 건립한 것으로 1682년(숙종 8) 나라에서 사액(賜額)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숙종실록』 7년 7월 26일) 충민사에는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한 16명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충의위(忠義衛)한수(韓洙)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딸은 생원(生員) 이식(李埴)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참봉(參奉)이면행(李勉行)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백헌집(白軒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속잡록(續雜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약천집(藥泉集)』
  • 『옥담시집(玉潭詩集)』
  • 『지호집(芝湖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