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李穆)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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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목 |
한글표제 | 이목 |
한자표제 | 李穆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연산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중옹(仲雍) |
호 | 한재(寒齋) |
시호 | 정간(貞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1년(성종 2) |
사망 | 1498년(연산군 4)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 통진현(通津縣) 여금산(餘金山) |
증조부 | 이율(李栗) |
조부 | 이손약(李孫若) |
부 | 이윤생(李閏生) |
모_외조 | 남양홍씨(南陽洪氏) |
형제 | (형)이수(李穟) |
처_장인 | 예안김씨(禮安金氏); 김수손(金首孫)의 딸 |
자녀 | (1자)이세장(李世璋) |
저술문집 | 『이평사집(李評事集)』 → 『한재집(寒齋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목(李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3년 12월 21일,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숙종실록』 43년 8월 28일 |
총론
[1471년(성종 2)∼1498년(연산군 4) = 28세].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현인(賢人). 행직(行職)은 성균관 전적(典籍)·영안도(永安道) 평사(評事)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이다. 자(字)는 중옹(仲雍)이고, 호(號)는 한재(寒齋)이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이윤생(李閏生)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홍맹부(洪孟阜)의 딸이다. 어려서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인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때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 영의정윤필상(尹弼商)을 탄핵하다가 공주(公州)에 부처(付處)되었다. 연산군 때 장원 급제하였는데, 김일손과 함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일손 등과 함께 사형되었고, 그 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9년(성종 2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의 합격자 1백 명 중에서 2등을 차지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유생 이목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영의정윤필상(尹弼商)은 성종(成宗)에게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뜻에 따라 불교를 믿을 것을 권유한 일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이목은 영의정윤필상을 간사한 인물이라고 여겨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이끌고 윤필상을 복주(伏誅)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성종은 이목을 잡아다가 친히 심문하기를 “네가 어째서 정승을 ‘간사한 귀신’이라고 배척하느냐.”고 물으니, 이목은 “그의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간사한 귀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목을 형리(刑吏)에게 내려 보내 국문하려고 하였으나, 우의정허종(許琮) 등이 극력 변호하면서 충청도 공주(公州)로 유배되는데 그쳤는데, 이때부터 이목은 직언(直言)하는 유생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비문]
1495년(연산군 1) 증광(增廣)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1496년(연산군 2) 호당(湖堂)에 뽑혀서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남곤(南袞)·성중엄(成重淹) 등 14인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서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김일손(金馹孫)·성중엄(成重淹) 등과 함께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성종실록』의 편찬이 끝나자, 연산군은 그 공을 표창하여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2월 21일) 그 후, 영안도(永安道: 함경도) 평사(評事)에 임명되어 함흥(咸興)으로 나갔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영남 사림파(士林派)인 김일손(金馹孫)은 사관(史官)으로서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기록하였다. 중국 초(楚)나라 장수 항우(項羽)에게 살해된 의제(義帝)를 애도한 이 글은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중국의 사례를 들어 은근히 비유하여 비판한 것이었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인 이목도 김일손의 사초를 반드시 사책(史冊)에 기록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으로서 사초를 미리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면서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김일손은 앞서 이극돈이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도 감사로 있으면서 장흥(長興)의 기생과 놀아났으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그와 관련된 비행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이극돈이 사초에서 이를 발견하고 김일손에게 그 기록을 삭제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김일손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도 한다. 이극돈은 결국 이 일을 그와 친한 유자광(柳子光)에게 알렸고, 유자광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왔던 당시 의정부 정승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상의하였는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해당한다며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곧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였고, 추국청서는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 등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사관(史官)들을 모두 체포하여,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차례로 추국하고 신문하여, 공초(供招)를 받게 하였다.
그때 김일손(金馹孫)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이목(李穆)과 권오복(權五福)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목이 실록청(實錄廳)에 출사(出仕)한 것이 이제 수십 일이 되었습니다. 형의 사초(史草)가 마침 같은 방(房)에 있는 성중엄(成重淹)의 손에 있는데, 당상관(堂上官)이 날마다 사초를 읽어보기 때문에 사책(史冊)에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성중엄을 독촉하고 설득하자, 성중엄도 마음에 감동을 받아 오히려 계운(季雲: 김일손의 자)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성중엄(成重淹)은 공초하기를, “신이 실록청(實錄廳)의 낭청(郞廳)이 되어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의 사초(史草)를 보고서 이목에게 ‘정여창의 사초는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고, 김일손의 사초는 기록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많이 기록했다.’ 고 말하니, 이목은 ‘네가 만약 김일손의 사초를 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네가 기록하지 않는 뜻을 기록하겠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연산군은 의정부에서 대신들이 사관(史官)의 죄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해 7월 26일, 의정부 영의정윤필상은 대신들과 같이 의논하여 서계하기를,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는 대역(大逆)의 죄에 해당하니,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이목(李穆)·허반(許磐)·강겸(姜謙)은 난언 절해(亂言切害)의 죄에 해당하니 참형(斬刑)하고 적몰(籍沒)하소서.” 하였다. 이에 김일손·권오복 등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이목·강겸 등은 참형을 당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 강직한 사림파의 면모를 지녔던 이목은 사형장에 끌려 나갈 때 신기(神氣)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며,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지어 부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그때 이목의 나이가 28세였다.[비문] 그 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이목을 미워하여, 그 무덤을 파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도록 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연산군 때 실권을 잡은 훈구파(勳舊派)가 김종직의 제자를 중심으로 점차 성장하던 사림파(士林派)의 신진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갑자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은 신원(伸寃)되고 추증(追贈)되었으나, <무오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갑자사화>는 단순히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출(廢黜) 문제와 관련된 사화(士禍)로서 연산군의 폐위가 곧 사안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무오사화>는 선왕인 세조의 왕위 찬탈로 야기된 정통성 문제와 관련된 사화였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 이목의 아들인 강원도 관찰사이세장(李世璋)이 <무오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이목을 신원(伸寃)하고 복관(復官)해 주도록 간청하자, 중종이 마침내 이목을 신원하고 복관시켜 주었다.인조 때 그 후손인 참장(參將)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면서 이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었다.
이목이 신원된 이후, 그 아들인 이세장이 아버지의 흩어진 시문을 수집하여 『이평사집(李評事集)』을 편찬하고, 그 손자인 무송 현감(茂松縣監)이철(李鐵)이 1585년(선조 18) 경상도 무송(茂松)에서 간행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 그 증손자인 이구징(李久澄)이 청송 군수(靑松郡守)로 있을 때, 1631년(인조 9) 증보판 『이평사집(李評事集)』 2권 1책을 경상도 청송에서 중간하였는데, 목 활자본 중간본은 현재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 1914년 그 후손들이 ‘이(李) 평사(評事)’라는 관직이 문집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그의 호(號)인 ‘한재(寒齎)’로 개제(改題)한 『한재집(寒齋集)』 4권 2책을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해서 못할 말이 없었다.
성종(成宗)이 언젠가 병이 들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무당을 시켜서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게 하고, 성균관의 벽송정(碧松亭)에 음사(陰司)를 설치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이때 성균관 유생 이목(李穆)은 여러 유생들의 앞장에 서서 몽둥이로 무당을 때려서 내쫓았는데, 유학(儒學)에서는 무당이나 음사(陰祀)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무당이 이러한 사실을 궁중에 호소하자, 크게 노한 인수대비가 임금의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이 일을 성종에게 고해 바쳤다. 그러자 성종은 겉으로 노한 척하면서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모든 유생들은 큰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서로 도망치기에 바빴으나, 이목은 혼자 태연히 제 발로 걸어 나가 자수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곧바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불러 “그대가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비의 습속(習俗)을 지니도록 제대로 이끌었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라고 하며, 특별히 선온(宣醞: 궁중 술)을 내려 유생들과 함께 마시도록 하였다.[비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英祖)편에 나오는 이 일화 속의 대비(大妃)는 인수대비(仁粹大妃: 1532~1575)가 아니라, 정희대비(貞熹大妃: 1418~1483)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목이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1489년(성종 20)은 이미 정희대비가 돌아간 지 6년 뒤가 되기 때문에, 이 일화에 등장하는 대비는 인수대비가 틀림없다.[『승정원일기』영조 1년 9월 11일]
윤필상(尹弼商)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때 마침 가뭄이 크게 들자, 유생 이목(李穆)이 상소하기를, “윤필상을 팽형(烹刑: 가마솥에 삶는 형벌)에 처하여 하늘에 제사지내야만, 하늘이 비를 내려 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우연히 길에서 이목을 만나게 된 영의정윤필상은 초헌(軺軒)을 멈추게 하고 큰소리로 “자네는 이 늙은이의 고기를 꼭 먹어야만 되겠는가.”하고 외쳤으나, 이목은 고개를 쳐들고 걸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비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의하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이 그 전에 품었던 감정을 가지고 ‘이목이 김종직에게 수학하였다’고 모함하여, 마침내 이목을 죽였다.”고 하였다.[『해동잡록』 5권] 그러나 <무오사화> 때 영의정윤필상은 “이목은 사초(史草)를 지은 자가 아니므로, 김일손의 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라고 하여 김일손보다 죄의 등급이 한 단계 낮은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장유(張維)가 지은 이목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이목에 대한 윤필상의 감정이 그래도 풀어지지 않아서, <갑자사화> 때 지하에 묻힌 이목에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더하였다.”고 하였으나, <갑자사화> 때 윤필상도 연산군 생모 윤씨(尹氏)의 폐출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17년(숙종 43) 8월, 예조 판서민진후(閔鎭厚)가 성종 때 있었던 이목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숙종에게 소개하면서 “같은 시대에 참화를 당한 김일손(金馹孫) 등은 모두 이미 시호(詩號)를 내렸으나, 이목(李穆)은 그의 후손인 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면서 증직(贈職)하는 데 그쳤을 뿐, 아직 시호(諡號)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니, 숙종이 시호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43년 8월 28일)
묘소는 경기 통진현(通津縣) 여금산(餘金山)의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 경기도 김포 통진(通津)의 상포(霜浦)에 있다. 이목이 참화를 당한 지 1백 30여 년이나 지나서야 그의 증손자인 공조 참판백촌(栢村)이구징(李久澄: 1568~1648)이 광해군 말년에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에게 부탁하여 묘표(墓表)를 짓고, 인조 초년에 계곡(溪谷)장유(張維)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충청도 공주(公州)의 유림(儒林)에서는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이목을 제향(祭享)하였는데, 이목이 공주에 유배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비문]
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는 형조 참판김수손(金首孫)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참화를 당하자, 외아들 이세장(李世璋)을 데리고 공주(公州)의 친정집에 내려가서 살았다. 남편보다 60년 뒤에 돌아갔는데, 공주(公州) 서촌(西村)에 있는 예안김씨의 선영(先塋)에 묻혔다. 외아들 이세장(李世璋: 1497~1562)은 태어난 지 1년 만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아버지가 참화를 당하면서 외갓집에서 성장하게 되었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도승지·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세장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건(李鍵)과 차남 이난(李鑾), 3남 이기(李錡)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4남 이갱(李鏗)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고, 5남 이철(李鐵)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장녀는 한성부 참군(參軍)정수후(鄭守厚)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종실인 화릉 부정(花陵副正) 이수혜(李秀蕙)에게 시집갔고, 3녀는 현령구운한(具雲翰)에게 시집갔다. 승지이철의 맏아들이 바로 이목의 문집을 발간하고 그 비문을 세운 공조 참판이구징(李久澄)이다.[비문]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이평사집(李評事集)』
- 『한재집(寒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