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신(李明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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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2년(태조 1)∼1459년(세조 5) = 68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와 홍주목사(洪州牧事) 등을 지냈다. 자는 백부(伯扶)이며,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를 지낸 이양(李揚)이며, 어머니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청주목사(淸州牧事)하자종(河自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이인범(李仁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천선(李千善)이다. 세종(世宗)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조카이자, 청원후(靑原侯) 심종(沈悰)의 사위이기도 하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14년(태종 14)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가 통사랑(通仕郞)을 거쳐 사온서(司醞署) 부직장(副直長)이 되었다. 1415년(태종 15) 의영고(義盈庫) 직장(直長)이 되었고, 돈녕부 승(丞)으로 전임되었다가 선무랑(宣務郞)으로 승진하였으며, 돈녕부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1418년(태종 18) 돈녕부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겨울에 계모(繼母)의 상(喪)을 당하였다.

1421년(세종 3) 상례(喪禮)를 마친 후 돈녕부 판관으로 복직 하였다가 봉직랑(奉直郞)으로 승진하였다. 1422년(세종 4) 종4품하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승품되고, 돈녕부 부지사(副知事)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으로 중군사직(中軍司直)이 되었다. 1427년(세종 9)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용양시위사(龍驤侍衛司) 전령호군(前領護軍)이 되었으며, 호익시위사(虎翼侍衛司)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 1428년(세종 10) 종3품하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품되고, 선공감(繕工監) 정(正)이 되었다가, 1429년(세종 11) 사재감(司宰監) 정에 임명되었다. 1430년(세종 12) 용기시위사(龍騎侍衛司) 대호군 겸 간판내시다방사(幹判內侍茶房事)가 되었는데, 1431년(세종 13)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사어(左司禦)를 겸임하였다. 1432년(세종 14) 통례문(通禮門) 지사(知事)가 된 후 곧 이어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고, 선공감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 1433년(세종 15)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전농시(典農寺) 판사(判事)가 되었다. 1434년(세종 16) 서반(西班)의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서 용기시위사 대호군, 세자익위사 좌익위(左翊衛)가 되었다가 돈녕부(敦寧府) 첨지사(僉知事)로 전임되었다.(『세종실록』 16년 9월 2일) 1439년(세종 21)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돈녕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세종실록』 21년 12월 1일) 1440년(세종 22) 추쇄소(推刷所) 제조(提調)를 겸임하였으며, 겨울에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연경(燕京)에 파견되었다.(『세종실록』 22년 10월 16일) 1443년(세종 25)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가 되었다가 1446년(세종 28)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품되고, 인수부(仁壽府) 윤(尹)이 되었다.(『세종실록』 25년 8월 22일),(『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돈녕부 동지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세종실록』 29년 1월 16일) 1449년(세종 31) 상례를 마친 후 중추원(中樞院) 동지사가 되었다가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돈녕부 지사(知事)가 되었는데, 진위사(陳慰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세종실록』 31년 9월 29일)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 그는 장모인 경선공주(慶善公主)의 위세를 빌어 황해도(黃海道) 문화(文化) 사람 사정(司正)임덕성(林德成)의 노비(奴婢)들을 빼앗아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 등지에 두고 은밀히 부리다가 발각되면서 직첩(職牒)을 박탈당하였다.(『문종실록』 1년 9월 13일)

1454년(단종 2) 공주목사로 나가서 권농관(勸農官)과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홍주목사(洪州牧事)로 전임되었다가 1457년(세조 3) 면직되었고, 1459년(세조 5) 6월 13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8세였다.(『세조실록』 3년 3월 9일),(『세조실록』 5년 6월 13일)

성품과 일화

이명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시호는 강평(康平)인데, 그 글자의 뜻을 보면, “온유(溫柔)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다스리는 데 과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고 하였다. 시호를 볼 때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으며, 관직에 나가 직임을 수행하면서 과오가 별로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의 졸기를 보면, “이명신(李明晨)이 척리(戚里)와 혼인(婚姻)을 맺었으며, 이간(吏幹 : 관리 재주)이 있었다.”고 하였다.(『세조실록』 5년 6월 13일) 이명신의 외아들 이추(李抽)는 윤회(尹淮)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윤회는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집현전 학사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길러냈다. 그의 손자 홍산현감(鴻山縣監)이의석(李宜碩)은 집현전 부제학최만리(崔萬理)의 딸과 혼인하였고, 그의 손자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의무(李宜茂)는 집현전 학사(學士)성희(成熺)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명신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문필(文筆)로 이름났기 때문에 세종 때 이름난 집현전 학사(學士) 집안과 혼인하였고, 이의무의 두 아들 이기(李芑)와 이행(李荇)은 관학(官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명신은 홍주목사로 있을 때 훌륭한 치적을 남겼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명환류(名宦類)에 기록이 있다. 그것을 보면 이명신이 홍주목사가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또 그의 손자 이의무도 홍주 목사가 되었을 때 그 치적이 충청도의 수령관 중에서 최상으로 평가되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 : 옷감 한 벌)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

묘소와 후손

시호(諡號)는 강평(康平)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1에 있는데, 이식(李植)이 지은 전기(傳記)가 남아있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12]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태조(太祖)의 차녀 경선공주의 딸로서, 아버지는 청원군(靑原君)심종(沈淙)이다.(『세종실록』 13년 12월 6일) 자녀는 1남을 두었는데, 외아들 이추는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냈고, 의정부 찬성(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손자 이의무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며, 증손자 이기는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증손자 이행(李荇)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고, 중종(中宗) 때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아서 신용개(申用漑)와 함께 훈구파(勳舊派)를 이끌며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이명신은 이이(李珥)의 5대조인데, 이명신(李明晨)-이추(李抽)-이의석(李宜碩)-이천(李蕆)-이원수(李元秀)-이이(李珥)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명재유고(明齋遺稿)』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이요정집(二樂亭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