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려(李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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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4년(성종 15)∼1512년(중종 7) = 29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자는 강재(强哉)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여산(礪山)이다. 아버지는 사온서(司醞署) 영(令)이평(李)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호군(護軍)허추(許樞)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낸 이증(李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 이원(李原)이다. 홍문관 부제학(副堤學) 이윤(李胤)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주(李胄)의 동생이기도 하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1년(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둘째 형 이주(李胄)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몰려 귀양 갔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이전에 궐 안에 대간청(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극형을 당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22일) 이 일로 아버지는 부관참시 되었으며, 형제가 모두 연좌되어 거제도로 귀양 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는데, 1507년(중종 2)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른 후, 1510년(중종 5)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1위로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급제 후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고, 독서당(讀書堂)에 뽑혔다. 이어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전임되었으나 몇 달 뒤 눈병으로 경연(經筵)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사직하였다.(『중종실록』 5년 8월 24일) 그 후 다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지만 눈병이 낫지 않았으므로 고사하였다. 중종이 특명으로 군직(軍職)인 사과(司果)에 임명하고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1512년(중종 7) 9월 28일 눈병이 악화되어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29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품이 맑고 밝았으며, 그 뜻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달랐다. 형제와 친구들과는 즐겁게 학문을 함께 갈고 닦으며 서로 독려하면서도 정분(精分)을 잃지 않았다. 말과 태도는 충성스럽고 후덕하였는데, 일을 추진 할 때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강직하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애사(哀辭)를 지은 우의정이행(李荇)은 이려를 처음 본 순간을 ‘용모가 순수하고 그 기상이 의연하고 헌걸차고 우뚝하여 무리들 속에서 환히 빛났다’고 서술하였다. 그를 마음에 두고 있던 이행은 외종형 이사겸(李思謙)에게 ‘이려만한 사람도 없다’며 그의 딸과 이려를 결혼 시키도록 하였다. 그 후 이려가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자, 친척들이 가끔 이행에게 ‘사람을 볼 줄 안다’고 하였다는데, 그럴 때마다 이행은 ‘아니다, 이려는 여기에서 그칠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행의 예견대로 이려는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서 장원을 하였다. 망년지교(忘年之交)의 교분을 나누던 이행과 이려는 갑자사화 때 함께 거제도로 귀양 가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게 되자 피차간의 교분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인재가 2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행은 더욱 비통해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여산군(礪山郡) 동쪽 전다리(田多里)의 언덕에 있고, 이행이 지은 애사와 김세필(金世弼)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니산현감(尼山縣監)이사겸(李思謙)의 딸이다. 자녀는 딸 1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십청헌집(十淸軒集)』
  • 『망헌유고(忘軒遺稿)』
  • 『동문선(東文選)』
  • 『고담일고(孤潭逸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이요정집(二樂亭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