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로(李東老)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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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동로 |
한글표제 | 이동로 |
한자표제 | 李東老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숙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원룡(元龍)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28년(인조 6) |
사망 | 1683년(숙종 9)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 광주(廣州) 선수산(先秀山) 선영(先塋) |
증조부 | 이경춘(李慶春) |
조부 | 이현(李俔) |
부 | 이시욱(李時煜) |
모_외조 |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직(李樴)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전의이씨(全義李氏); 이거원(李巨源)의 딸 →(자녀) 1남 1녀 (둘째부인)아주신씨(鵝州申氏); 신재(申在)의 딸 →(자녀) 1남 3녀 |
자녀 | (1자)이상겸(李尙謙) (2자)이상태(李尙泰) (3자)감찰(監察) 이상관(李尙觀) (4자)이상진(李尙震) (1녀)홍귀서(洪龜敍)의 처 (2녀)주부(主簿) 유집(柳)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동로(李東老)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개수실록』 15년 6월 21일, 『현종개수실록』 6년 2월 20일 |
총론
[1628년(인조 6)∼1683년(숙종 9) = 76세]. 조선 중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이다. 자(字)는 원룡(元龍)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簽知事)이시욱(李時煜)이고, 어머니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이직(李樴: 용재 이행의 후손)의 딸이다.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제 5왕자)이여(李璵)의 8대손이다. 좌의정이세백(李世白)·한강(寒岡)정구(鄭逑)와 절친한 사이였다. 같은 시대 활동한 무인(武人) 이동로(李東老)와는 본관이 같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서인 이동로는 대간(臺諫)이 되어,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허적(許積)을 가장 많이 탄핵하였는데, 서인의 영수인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은 이동로의 언론(言論)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송시열의 추천으로 효종과 현종 때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숙종이 즉위할 때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으나, <갑인(甲寅) 예송(禮訟)>으로 서인 송시열이 남인 허적에게 패배하여 귀양을 가자, 이동로도 벼슬에서 쫓겨나 은거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이 죽음을 당하자, 이동로는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회덕(懷德)에 은거하였다.
효종~숙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654년(효종 5) 춘당대시(春塘臺試)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비문에 의하면, 이동로가 역임한 내외 관직은 다음과 같다. 내직으로는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저작(著作)·박사(博士),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 예조 좌랑(禮曹佐郞), 사간원의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성균관 직강(直講), 사복시 정(司僕寺正), 장악원 정(掌樂院正),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평안도 도사(都事)·고산 찰방(高山察訪)·개성 경력(開城經歷)·청풍 부사(淸風府使)·선산 부사(善山府使)·성주 목사(星州牧使)·양주 목사(楊州牧使)·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비문] 또 효종의 왕비 인선 대비(仁宣大妃)의 상(喪)에 국장도감(國葬都監)의 감수방상(監修方上)에 임명되어, 수고한 공로로써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陞品)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다. 또한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순서에 따라 도승지(都承旨)까지 올랐다.[비문]
실록에 의하면, 이동로가 역임한 내외 관직은 다음과 같다. 현종 때 1660년(현종 1)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1년(현종 2) 진위사(陳慰使)홍주원(洪柱元)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665년(현종 6) 경상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가, 아전의 잘못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66년(현종 7)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7년(현종 8)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1668년(현종 9)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1673년(현종 14) 다시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1674년(현종 15) 부사직(副司直)으로 전임되었으며,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15년 6월 21일) 숙종 때 1674년(현종 15)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어 숙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서인 송시열이 <갑인(甲寅) 예송(禮訟)>에서 남인 허적(許積)에게 패배하여,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귀양을 가자, 이동로도 벼슬에서 쫓겨나면서 경기도 광주(廣州) 선수산(先秀山)의 선영(先塋) 아래에 은거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허적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남인들이 쫓겨나고 서인들이 집권하자, 이동로도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회덕(懷德)에 은거하였다. 이후 이동로는 나이가 많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광주의 선산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1683년(숙종 9) 노병으로 서울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겉으로는 화락하고 낙이(樂易)하였으나, 속으로는 날카롭고 예리하였다.
이동로는 중국 진(陳)나라 강총(江摠)의 어릴 때처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문장을 얽어 글을 지으면 그 글 솜씨가 어른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문명(文名)이 뛰어났으므로, 벼슬에 나아가서는 한강(寒岡)정구(鄭逑) 등과 어울려 시문(詩文)을 지어 서로 주고받았다.[『한강집(寒岡集)』 별집 2권] 이동로는 대각(臺閣)에 있을 때, 오로지 바른 사람을 도와주고 사악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으므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권귀(權貴)의 압력에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허적(許積)을 가장 많이 탄핵하였는데, 서인의 원로와 중진들이 그를 매우 칭찬하였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은 이동로의 언론(言論)이 대단히 정직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일찍이 그와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 온 영안위(永安尉)홍주원(洪柱元)은 그의 행동을 보고 ‘독실한 군자(君子)’라고 인정하였으며, 기천(沂川)홍명하(洪命夏)도 그의 인품에 대하여 “내행(內行)을 닦아 마음이 화평하고 편안하며 남과 경쟁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결코 그를 따라갈 수 없다.”고 논평하였다.[비문]
이동로가 평안도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평안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마침 평안도 관찰사가 죄를 지어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자, 조정에서는 진휼(賑恤)하는 일을 모두 도사이동로에게 맡겼다. 이동로는 먼저 기민(饑民)의 숫자를 헤아려 일을 기획한 후, 평안도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빠짐없이 구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냈는데, 그가 관찰사 대신 일을 맡아서, 마치 물이 흐르듯이 일을 막힘없이 처리하자, 평안도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는데, 그때 이동로의 나이 겨우 30여 세였다.[비문] 이때 막료(幕僚)로서 명성을 얻은 이동로는 그 후 큰 고을이나 이름난 고을의 수령관을 맡았는데,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모두 막힘이 없이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점차 지방 수령관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비문]
1665년(현종 6) 2월에 이동로(李東老)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아전의 잘못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성주의 호방(戶房) 아전 장원일(張元一)은 고을 창고에 있는 군포(軍布)를 해마다 훔쳐냈는데, 성주 목사이동로가 장부에 기재된 군포의 수량을 점검하다가, 이를 발견하였다. 목사이동로가 이 사실을 경상도 감사에게 보고하면서, 결국 아전 장원일은 전 가족과 함께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장원일은 유배지로 가지 않고 도중에 도망쳐서 서울에 숨어 있었다. 도망친 아전 장원일을 형조에서 체포하여 엄하게 형신(刑訊)한 다음에 효시(梟示)하였는데, 성주 목사이동로도 이에 연루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파직되었다.(『현종개수실록』 6년 2월 20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선수산(先秀山) 선영(先塋)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 이세백의 아들)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첫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이거원(李巨源)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아주신씨(鵝州申氏)는 신재(申在)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상겸(李尙謙)은 오위(五衛) 시직(侍直)을 지냈고, 차남은 이상태(李尙泰)이며, 3남 이상관(李尙觀)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4남은 이상진(李尙震)이다. 장녀는 홍귀서(洪龜敍)의 처이고, 차녀는 주부(主簿)유집(柳)의 처이다.[비문]
경기도 광주(廣州) 선수산(先秀山)에 있는 이동로(李東老)의 무덤 왼쪽에 첫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가 부장되었고, 둘째 부인 아주신씨(鵝州申氏)는 오른편에 부장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
- 『갈암집(葛庵集)』
- 『한강집(寒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