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온(李德溫)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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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덕온 |
한글표제 | 이덕온 |
한자표제 | 李德溫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사화(士和) |
호 | 구촌(龜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2년(명종 17) 8월 28일 |
사망 | 1635년(인조 13) 10월 15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충청도 남포(藍浦) |
묘소소재지 | 충청도 남포현(藍浦縣) 남쪽 주렴산(珠簾山)의 언덕 |
증조부 | 이탁(李濯) |
조부 | 이지(李枝)[방목] 이발(李柭)[비문] |
부 | 이뢰(李雷) |
모_외조 | 경주정씨(慶州鄭氏); 정재(鄭梓)의 딸 |
처_장인 | 순천박씨(順天朴氏); 박광원(朴光遠)의 딸 →(자녀) 3남 |
자녀 | (1자)이신휘(李愼徽) (2자)이신징(李愼徵) (3자)이신미(李愼微) |
저술문집 | 『시고(詩稿)』, 『유어(類語)』, 『구촌집(龜村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덕온(李德溫)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7년 8월 3일, 『선조실록』 34년 1월 6일, 『선조실록』 39년 12월 9일, 『선조실록』 34년 1월 6일 |
총론
[1562년(명종 17)∼1635년(인조 13) =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지(承旨)·사헌부 장령(掌令)·성주목사(星州牧使)이다. 자(字)는 사화(士和)이고, 호(號)는 구촌(龜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남포(藍浦)이다. 아버지는 호남군(湖南君)이뢰(李雷)이고, 어머니 경주정씨(慶州鄭氏)는 학생(學生) 정재(鄭梓)의 딸이다. 임영 대군(臨瀛大君: 세종의 제 4왕자)의 현손이다. 소북(小北)의 영수인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을 추종하였으나, 서인의 중진인 상촌(象村)신흠(申欽)과 절친한 사이였다.
선조 때 소북(小北) 유영경의 추천으로 사헌부 장령(掌令)과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광해군 즉위 후,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자, 파직되면서 고향 남포(藍浦)로 돌아와 16년 동안 은거하며 시고(詩稿)와 유어(類語)를 지었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거듭 실패하다가, 1591년(선조 24)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고, 그 뒤에 승문원 박사(博士)가 되어,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겸임하였다.[비문] 1594년(선조 27)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어 활동하였으며,(『선조실록』 27년 8월 3일) 예조(禮曹)·병조(兵曹)·공조(工曹) 3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비문] 1600년(선조 33)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외직으로 쫓겨나, 1601년(선조 34) 함경도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다.(『선조실록』 34년 1월 6일)
1604년(선조 37)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의 추천으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활동하다가, 성균관 사예(司藝)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가,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는데,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다시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였다. 1606년(선조 39)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가 되었고,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가, 그해 말에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 39년 12월 9일) 이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면서 비로소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비문] 선조 말년에 소북(小北)의 영수인 유영경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은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면서, 북인이 대북파와 소북파로 나뉘어 크게 대립하였다. 이때 이덕온은 소북의 영수인 유영경의 추천으로, 1607년(선조 40)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1608년(선조 41)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다.
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은 소북의 유영경을 체포하여 경흥(慶興)으로 유배시켰다가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때 이덕온도 소북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전라도 남포(藍浦)로 돌아온 이덕온은 고향에서 농부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면서, 시문(詩文)을 짓고,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읽으며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이 내려지면서 관직이 회복되었으나, 그는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고 시(詩)를 읊고 글을 쓰면서, 16년 동안 은거하였다.
1635년(인조 13) 10월 15일, 충청도 남포(藍浦)의 옛집에서 노병(老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4세였다. 『시고(詩稿)』와 『유어(類語)』를 편찬하였으나,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에 문집(文集)인 『구촌집(龜村集)』이 간행되었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온화하고 정직하였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함경도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을 때, 반대파 사관(史官)은 사평(史評)에서 “사람이 경망스러웠다.”고 비판하였다.(『선조실록』 34년 1월 6일)
집안에 있을 때에는 책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였으며, 관직에 임해서는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접할 때에는 반드시 성의와 신의를 다하였다. 광해군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파직된 이후, 바닷가에서 귀양살이할 때에는 날마다 농사짓는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바둑과 술로 소일하면서 지냈다. 이덕온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내려진 대사령(大赦令)으로 관직이 회복되고, 상촌(象村)신흠(申欽)의 추천으로 대간(臺諫)의 청요직(淸要職)에도 임명되었으나, 한번 서울에 올라가 입궐(入闕)하여 인조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한 이후, 다시 고향인 충청도 남포(藍浦)로 돌아와 은거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책을 읽기를 좋아하였고, 시(詩)를 읊고 글쓰기를 즐겼는데, 『시고(詩稿)』 5권과 『유어(類語)』 20권을 엮어 집에 소장하였다.[비문] 그러나 그 『시고(詩稿)』와 『유어(類語)』는 호란(胡亂)을 겪으면서 유실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덕온(李德溫)이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한 1585년(선조 18)에 상촌(象村)신흠(申欽: 1566~1628)도 사마시의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두 사람은 성균관에 함께 재숙(齋宿)하며 공부하였으므로 친하게 지냈는데, 당시 20세였던 신흠이 24세인 동방(同榜)의 이덕온을 친형처럼 따랐다. 신흠은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후, <임진왜란> 때 서인의 영수 도체찰사(都體察使)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활동하다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그 아들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면서 부마(駙馬)가 되자, 신흠은 도승지(都承旨)·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에 비하여 이덕온은 30세가 되어서야 겨우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소북(小北)의 영수인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을 추종하면서, 선조 말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선조에게는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있었으나, 50세 때에 18세의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는 만년에 서출 왕자인 광해군을 싫어하고 적출 왕자인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일파는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 일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조 말년에는 소북이 정권을 잡고 대북의 정인홍 일파를 모조리 추방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으면서 소북의 유영경을 죽이고 그를 추종하던 이덕온 등을 유배시켰다. 이후 광해군은 계축옥사를 계기로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의 생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던 신흠등 서인의 중진들도 모두 조정에서 쫓겨났다. 결국 서인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하여 광해군을 축출시키고 인조를 옹립하였는데, 소북의 이덕온도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상촌(象村)신흠(申欽)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소북의 이덕온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충청도 남포(藍浦)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신흠의 아들 신익상(申翊聖)은 성균관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 이덕온과 아버지 신흠(申欽)과의 깊은 인연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촌(龜村)이덕온(李德溫)의 비문을 부탁받자,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남포현(藍浦縣) 남쪽 주렴산(珠簾山)의 언덕에 있는데,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 신흠의 아들)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순천박씨(順天朴氏)는 부호군(副護軍)박광원(朴光遠)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장남 이신휘(李愼徽)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차남은 이신징(李愼徵)이고, 3남은 이신미(李愼微)이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백호전서(白湖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동강집(東岡集)』
- 『백호집(白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