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李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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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4년(중종 39)∼1598년(선조 31) = 55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자는 여유(汝惟)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며,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경상남도 의령(宜寧)이다. 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지낸 이효범(李孝範)이며, 어머니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판관(判官)문은(文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제용감(劑用監) 첨정(僉正)을 지낸 이한(李翰)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이문창(李文昌)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기도 하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방목(榜目)』] 1569년(선조 2)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피화(被禍)된 충현들의 신원(伸冤)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77년(선조 10)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2년 후인 1579년(선조 12) 모친상을 당하였다. 연이은 상례(喪禮)를 마친 후 1584년(선조 17) 봉선전(奉先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590년(선조 23) 증광(增廣)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7세였다.[『방목』]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인 1591년(선조 24) 직장(直長)에 보임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였다. 결국 이노는 조종도와 함께 함양에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김성일(金誠一)을 만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삼가와 단성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여러 고을의 사저관(私儲官)으로 차임되어 군량미를 조달하였는데, 김성일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왜적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당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수(金睟)는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했는데, 김수의 무고로 이노도 곽재우와 함께 탄핵을 받을 뻔하였으나, 김성일이 구원하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성일이 경상우도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에 임명되자 이노는 그를 따라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여러 고을에서 의연곡(義捐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태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형조 좌랑(佐郞) 겸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主官)에 임명되었고, 이어 거창의 임시 수령으로 차임되었다. 그 해 명(明)나라 제독이여송(李如松)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비판하는 서계(書啓)를 보내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임명되었고, 1597년(선조 30)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598년(선조 31) 2월 29일 금산(金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용사일기(龍蛇日記)』, 『사성강목(四姓綱目)』, 『송암집(松巖集)』, 『문수지(文殊志)』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이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뛰어나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냈다. 강개하여 지조와 절조가 있었고, 행동거지는 구차하지 않았다.[『송암집(松巖集)』]

1592년(선조 25) 6월 경상우도초유사김성일의 보고에 따르면, 의령에서는 곽재우, 거창에서는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켰고,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동지인 현풍(玄風)에 사는 곽율·박성(朴惺)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있었다.(『선조실록』 25년 6월 28일) 이때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을 참수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겨 참수를 금지하였으므로, 군사들이 왜적을 만날 때마다 곧장 앞으로 달려 나아가 싸우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왜적이 조선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며 멀리까지 달려왔다. 이에 이노는 곽재우에게 “사람들 중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만약 참수를 금지하여 상을 주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반드시 태만해질 것이니, 무엇으로 싸우게 할 것인가.” 라고 하자, 곽재우가 그의 말을 따라 왜적의 참수를 허락하였다. 그 후에 우리 군사들이 모두 다투어 왜적을 죽여 참수하니 그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김면의 군대가 군량이 부족하여 와해될 우려가 있자, 이노는 사저관(私儲官)으로서 여러 고을을 돌며 사민들을 효유하여 의령에서 쌀 680석을, 함안에서 156석을, 산음에서 100여 석을 모았다. 그리고 이것을 산음 현감김락(金洛)에게 맡겨 김면의 군대에 보내게 하였다.

이때 정인홍의 막하에는 참모가 없었는데, 그의 동지인 박성이 이를 걱정하여 김성일에게 이노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하기를 “내가 여유(汝唯 ; 이로의 자(字))를 얻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 사람을 빼앗아 저기로 보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저들이 여유의 말을 듣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나와 김성일은 의병을 일으켜 일을 같이 하며 시종 함께하기로 맹세하였는데, 지금 어찌 저버리고 다른 쪽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박성이 사과하였다. 김성일은 이처럼 이노를 중하게 여겼고, 믿음을 지키며 변치 않았다.

전쟁 중에 진주(晉州)의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곡식을 모두 지리산에 숨겨두고 환곡을 바치지 않아 군량을 공급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김성일이 잡아들인 10여 명에게 무거운 형률을 적용하여 다스리려고 하자, 박성은 “이들을 엄하게 다스려 이러한 습속을 징계하여야 마땅합니다.”라고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급하게 처리하면 더욱더 소란스럽게 될 것이니, 의리로써 그들을 깨닫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곡식을 실어다가 바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하고서는 형틀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의리로써 설득하였다. 또 효유하는 방문을 붙이니, 한 달도 되지 않아 수 만여 석의 곡식이 모였으므로, 관병과 의병의 군량이 충족되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묘소는 경상남도 의령현 소산(所山)의 언덕에 있고, 허목(許穆)이 쓴 행장이 남아있다.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있는 낙산서원(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호군(護軍)정위(鄭渭)의 딸인데, 자녀는 없다. 상의원(尙衣院) 별제(別提)를 지낸 이만승(李曼勝)이 후사(後嗣)가 되었는데, 이만승은 동생인 이지(李旨)의 아들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암집(松巖集)』
  • 『용사일기(龍蛇日記)』
  • 『학봉집(鶴峯集)』
  • 『고대일록(孤臺日錄)』
  • 『고봉집(高峯集)』
  • 『기언(記言)』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대산집(大山集)』
  • 『덕계집(德溪集)』
  • 『송암유고(松菴遺稿)』
  • 『검간집(黔澗集)』
  • 『운천집(雲川集)』
  • 『인재집(訒齋集)』
  • 『우복집(愚伏集)』
  • 『가휴집(可畦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완정집(浣亭集)』
  • 『노주집(蘆洲集)』
  • 『두와집(蠹窩集)』
  • 『남명집(南冥集)』
  • 『망우집(忘憂集)』
  • 『후광세첩(厚光世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