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연(李皎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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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교연 |
한글표제 | 이교연 |
한자표제 | 李皎然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성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순보(純甫) |
시호 | 공안(恭安)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13년(태종 13) |
사망 | 1475년(성종 6) 4월 29일 |
본관 | 고성(固城)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이귀생(李貴生) |
조부 | 이운로(李云老) |
부 | 이종(李瑽) |
모_외조 | 전의 이씨(全義李氏) : 이작(李作)의 딸 |
형제 | (동생)이비연(李賁然) |
처_장인 | 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희제(尹希齊)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교연(李皎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4년 8월 14일, 『세종실록』 24년 8월 18일, 『세종실록』 31년 3월 10일, 『문종실록』 2년 2월 13일, 『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세조실록』 4년 3월 19일, 『세조실록』 5년 3월 25일, 『세조실록』 5년 6월 3일, 『세조실록』 5년 8월 25일, 『세조실록』 6년 5월 29일, 『세조실록』 7년 3월 11일, 『세조실록』 9년 7월 6일, 『세조실록』 11년 8월 28일, 『세조실록』 14년 7월 7일, 『예종실록』 1년 1월 2일, 『성종실록』 6년 4월 29일 |
총론
[1413년(태종 13)∼1475년(성종 6) = 63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순보(純甫)이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승(丞)이종(李瑽)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도호부사(都護府使)이작(李作)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운로(李云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귀생(李貴生)이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한성부사(漢城府事)윤희제(尹希齊)의 딸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42년(세종 24) 친시(親試)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세종실록』 24년 8월 14일) 급제 후 전농시(典農寺) 주부(主簿)에 보임되었다.(『세종실록』 24년 8월 18일) 1443년(세종 25)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으로 전임되었다. 1445(세종 27)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1449(세종 31)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31년 3월 10일)
1451년(문종 1) 종부시(宗簿寺) 소윤(少尹)이 되었고, 1452년(문종 2) 전세(田稅) 징수 과정에서의 불법(不法)을 규찰하기 위하여 아산(牙山)등지에 파견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13일) 그 해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전임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목사로서 원종공신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7년(세조 3) 목사로 재임할 때에 선정을 베풀었다하여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면서 오위대호군(五衛大護軍)에 임명되었고, 이어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458년(세조 4) 병조 지사(知事)를 겸하였으며, 병조 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세조실록』 4년 3월 19일)
1459년(세조 5)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된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차례로 역임하였다.(『세조실록』 5년 3월 25일),(『세조실록』 5년 6월 3일),(『세조실록』 5년 8월 25일) 1460년(세조 6)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고 호조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세조실록』 6년 5월 29일) 1461(세조 7) 명나라에서 귀환한 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전임되었으며, 1463년(세조 9)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가 되었다.(『세조실록』 7년 3월 11일),(『세조실록』 9년 7월 6일) 1465(세조 11)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중추원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세조실록』 11년 8월 28일) 1468(세조 14) 형조 참판(參判)을 거쳐 1469(예종 1)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며, 1475년(성종 6) 부호군(副護軍)으로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 14년 7월 7일),(『예종실록』 1년 1월 2일),(『성종실록』 6년 4월 29일)
일화
이교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규례에 승지(承旨)는 1명이 입직(入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조(世祖) 때 승지이교연이 입직 중에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워 있다가 마침 세조가 이교연에게 공무에 대해 물었으나 술에 취해 대답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2명이 입직하는 것이 규례로 정해졌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성이씨족보(固城李氏族譜)』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은대조례(銀臺條例)』
- 『인재집(忍齋集)』
- 『노서유고(魯西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