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지변(李适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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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인조 2)에 이괄 등이 인조정변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일으킨 반란.

개설

1624년에 인조정변에서 많은 공훈을 세운 이괄이 한명련 등과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은 공신 책봉 과정에서 받은 푸대접에 대한 불만과 평안도 지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거병(擧兵)했다.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이괄의 난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원인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정변에 가담하여 많은 공헌을 했다. 1623년 3월 13일 밤 2시경에 총대장 김류의 불참으로 홍제원(弘濟院)에 모인 정변군은 불안해졌다. 이때 이괄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안정시켰으나 뒤늦게 나타난 김류에게 정변군의 지휘권을 넘기는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정변 직후에 이괄은 북병사(北兵使)로 발령이 났으나, 김류와 이귀 등이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에 따라서 좌포도대장 임무를 수행했다. 7월에는 후금(後金)과의 마찰로 변방에서 분쟁이 잦아지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 발탁되어 영변에 출진(出鎭)하여 성책(城柵)을 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경 경비에 힘썼다(『인조실록』 1년 7월 3일). 그러나 10월에 정사공신 2등에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발단

1624년 아들 이전(李旃)이 공신들의 전횡으로 인한 정국의 난맥상을 지적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무고(誣告)를 받았다. 이괄은 아들을 체포하기 위해 선전관(宣傳官)과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가 파견되자, 평소 가지고 있던 공신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경과

이괄은 반역 혐의로 서울에 압송되던 구성부사(龜城府使)한명련(韓明璉)을 구출하고 서로 제휴하여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했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란했고 이괄은 서울을 무혈점령했다. 이괄은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을 안정시켰으나, 서울 입성 이튿날 장만(張晩)이 거느린 관군과 길마재(鞍峴)에서 대전했다가 참패하였다. 이로 인해 수하 참모와 함께 수구문(水口門)을 거쳐 이천(利川)으로 도망했다가 묵방리(黙坊里)에서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이수백(李守白)에게 피살되고 난은 평정되었다(『인조실록』 2년 2월 15일).

그의 반란은 뒤에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노영구, 「인조 초~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전술 전개」, 『한국사학보』4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