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중(李敬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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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경중 |
한글표제 | 이경중 |
한자표제 | 李敬中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공직(公直) |
호 | 단애(丹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2년(중종 37) 5월 28일 |
사망 | 1584년(선조 17) 8월 14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의 선영(先塋) |
증조부 | 이숙(李潚) |
조부 | 이집(李輯) |
부 | 이감(李瑊) |
모_외조 | 서흥김씨(瑞興金氏); 김윤장(金允章)의 딸 |
형제 | (형)이성중(李誠中) (동생)이양중(李養中) |
처_장인 | 배천조씨(白川趙氏); 조언충(趙彦忠)의 딸→(자녀)2남 1녀 |
자녀 | (1자)이유혼(李幼渾) (2자)이유순(李幼淳) (1녀)박기준(朴耆俊)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경중(李敬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6년 2월 8일, 『선조실록』 22년 12월 8일 |
총론
[1542년(중종 37)∼1584년(선조 17) = 4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집의(執義)·홍문관 응교(應敎)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다. 자(字)는 공직(公直)이고, 호(號)는 단애(丹崖)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금천군(錦川君)이감(李瑊)이고, 어머니 서흥김씨(瑞興金氏)는 사헌부 감찰(監察)김윤장(金允章)의 딸이다. 이소재(履素齎: 양녕대군의 현손)·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었다.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세종의 서출 제2왕자)의 현손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이성중(李誠中)의 동생이고, 좌부승지(左副承旨)이양중(李養中)의 형이다.
성격이 강직하여, 선조 때 삼관(三館)의 청요직(淸要職)에 있으면서 서인의 영수 이이(李珥)·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공격하고 동인의 영수 유성룡·김성일을 옹호하였다.
서인의 실세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와 그 조카 윤현(尹晛)이 뇌물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간원 정언(正言)이경중이 이른바 ‘3윤(尹)’을 탄핵하면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경중은 동인이 유성룡·김성일의 온건파와 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의 과격파로 나누어질 때, 형 이성중과 함께 온건파인 유성룡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는 이발이 추천하는 정여립을 홀로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는데, 그가 죽은 뒤, <정여립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선조는 그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칭찬하고, 그에게 이조참판을 증직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그때 동갑의 유생 유성룡(柳成龍)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2년 뒤인 1570년(선조 3)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573년(선조 6) 4월, 홍문록(弘文錄)에 선록되었고, 특별히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발탁되었다. 이때 권점(圈點) 5점 이상을 받은 백유양(白惟讓)·조원(趙瑗)·이발(李潑) 등 13인이 뽑혔다.(『선조실록』 6년 2월 8일) 당시 홍문관에 직제학(直提學)은 이이(李珥)가, 수찬(修撰)은 김우옹(金宇顒)이, 저작(著作)에는 홍적(洪廸)이, 정자(正字)에 이경중이 임명되면서, 사람들이 “옥당(玉堂: 홍문관)에는 현인(賢人)만 모였다.”고 하였다.[비문]
1575년(선조 8) 명종의 왕비 의성대비(懿聖大妃)심씨(沈氏: 심희수의 누이)가 돌아가자, 홍문관에서는 왕이 백관(百官)을 따라 왕도 궁정(宮庭)에서 곡(哭)을 하도록 청하였는데, 국장(國葬)때 망곡(望哭)하는 예(禮)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정자이경중이 발론(發論)하였고 직제학이이와 수찬김우옹이 찬성하였다. 1576년(선조 9)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77년(선조 10)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을 때, 인종의 왕비 공의대비(恭懿大妃)박씨(朴氏)가 돌아갔다. 이때 의정부의 대신들은 기년복(朞年服)을 결정하였으나, 홍문관의 수찬이경중 등은 왕통(王統)을 계승한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왕에게 3년 복을 입도록 청하니, 선조가 홍문관의 주장을 따랐다. 1578년(선조 11)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당시 명종의 왕비 의성대비(懿聖大妃)심씨(沈氏)의 외삼촌 이량(李梁)이 권력을 잡고 전횡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량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귀양 보낼 것을 논하였다. 1580년(선조 13)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는데, 실록청(實錄廳)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비문]
1581년(선조 14)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을 이조에 발탁하려고 적극 추천할 때, 이조 좌랑이경중은 “이 사람을 발탁하면 후일에 반드시 나라의 화(禍)가 될 것입니다.”라며 혼자 반대하였다. 이 일로 그는 장령정인홍(鄭仁弘)과 지평박광옥(朴光玉)의 탄핵을 받아 이조 좌랑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정여립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면서, 그의 예견이 적중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해 8월,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이경중과 형 이성중(李誠中)·동생 이양중(李養中) 3형제는 3년 동안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히 몸이 약했던 이경중은 무척 수척해지면서 병에 걸렸다. 어머니 상례를 마친 뒤,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와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들어 결국 부임하지 못하였다.[비문]
1584년(선조 17)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응교(應敎)로 승진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 전해에 동인과 서인이 당파 싸움을 벌이다가,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동인이 배척을 당하였는데, 대사헌정철(鄭澈)은 유배된 동인의 중진 43명에게 죄를 가중(加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사헌부 집의이경중이 반대하면서 정철의 음모가 저지되었다. 대사헌정철은 이 일을 선조에게 아뢰었고, 이를 노여워한 선조는 이경중을 파직시키고 경상도 추쇄어사(推刷御史)로 나가게 하였다.[비문] 병든 몸으로 경상도로 내려가게 된 이경중은 결국 1584년 8월 14일, 경상도 밀양(密陽)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43세였다.[비문] 그해 말에 경기 파평(坡平)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는데, 그의 친구 유성룡(柳成龍)은 조문하기를, “소소(昭昭)한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할 수 없고, 권권(惓惓)한 그의 충성을 빼앗을 수 없고, 은은(誾誾)한 그의 정직함을 감히 흔들 수 없었다.” 하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온화하고 강직하였으며, 뜻이 확고하고 행동이 침착하여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이경중은 아버지 금천군(錦川君)이감(李瑊)과 어머니 서흥김씨(瑞興金氏) 사이의 3형제 중 둘째아들로 1542년(중종 37) 5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단정하며 침착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므로, 아버지 금천군이감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어릴 때부터 형 이성중(李誠中)과 동생 이양중(李養中)과 함께 삼촌 순천군(順川君)이관(李琯)에게 가학(家學)을 배웠는데, 모두 수재(秀才)라고 소문이 났었다. 이후, 아버지 이감과 삼촌 이관은 이성중·이경중·이양중 3형제를 이소재(履素齎)이중호(李仲虎: 양녕대군 현손)에게 보내 학문을 수련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이감과 이관은 이중호와 서로 친구사이였는데, 이감이 이중호의 학문이 고매하다고 여겨, 스스로 그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이 연유로 아버지 금성군이감과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이소재·이호중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이경중은 나이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형 이성중은 나이 20세 때 생원과에 합격하였으나, 동생 이경중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 때 생원과에 합격하였는데, 성균관에서 동갑인 유성룡(柳成龍)을 만나 깊이 사귀게 되었다. 특히 유성룡의 권유로 형 이성중과 동생 이양중이 함께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이성중·이경중·이양중 3형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친구 유성룡·김성일(金誠一)과는 지향하는 뜻이 같았으므로, 이후 동인(東人)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이경중은 언행이 정직하고 경술(經術)이 높았는데, 평소 남과 농담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청렴결백하였으므로, 벼슬이 아무리 높았어도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1575년(선조 8)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영의정박순(樸淳), 대제학이이(李珥), 대사헌김계휘(金繼輝) 등은 서인(西人)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였고, 대사간(大司諫)허엽(許曄), 수찬김우옹(金宇顒), 정자이경중 등은 동인(東人)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였다. 동서 분당이 이루어지기 직전, 황해도 재령에서 종이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종이 무죄를 선고 받자, 대사간(大司諫)허엽(許曄)은 그 재판의 위관(委官: 재판장)이었던 영의정박순(朴淳)이 옥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도 영의정박순을 탄핵하였는데, 사간원 정언(正言)조원(趙瑗)만 홀로 대신(大臣)을 가볍게 논죄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므로,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대사헌김계휘(金繼輝)는 “허엽은 죽은 주인의 친족이므로 그가 하는 말은 공평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이(李珥)도 정언조원의 주장에 찬성하여 양사(兩司)의 관원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문관 정자이경중은 “안 됩니다. 옥사를 다스리는 체통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며, 친한 자에게 사심을 두었다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므로, 논할 바가 못 됩니다.”라고 반박하니, 이이도 이경중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율곡(栗谷)이이(李珥)는 양측을 서로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동서 붕당(東西朋黨)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다.[비문] 조정의 관료들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하여 서로 당파 싸움을 벌이고 점차 치열하게 공격하니, 이경중은 형 이성중과 동생 이양중과 함께 항상 개연히 동서 분당을 한탄하며 크게 근심하였다.[비문]
1578년(선조 11)에 진도 군수(珍島郡守)이수(李銖)라는 자가 당시 서인의 실세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와 그 조카 윤현(尹晛)에게 쌀을 뇌물로 준 사건이 발각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윤두수·윤근수·윤현을 ‘3윤(三尹)’이라고 불렀는데, 사헌부에서 이 사건을 논핵하여 ‘3윤(三尹)’을 파직시켰다. 의금부에서 진도 군수이수를 잡아서 국문하였는데, 그의 공초(供招)에 관련된 자들이 모두가 승복하였으나, 저자에서 쌀을 보관하였던 자만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서인 출신 대사간정철(鄭澈)이 주장하기를, “이수의 사건은 실정이 없습니다. 쌀 보관을 맡았던 자가 석방되었으니, ‘3윤’도 서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정언이경중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뇌물을 준 자는 형을 받았는데, 뇌물을 받은 자가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서인과 동인의 당론(黨論)은 더욱 격화되었다. 후임 대사간이이(李珥)가 서인의 정철·김계휘·한수(韓修)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동인(東人)의 공격이 너무 심하니, 청컨대, 사류(士類)들을 보호하도록 하소서.” 라고 상소하였다. 이때 정언이경중이 불평하기를, “숙헌(叔獻: 이이의 자)의 상소가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에 나오지 않고 오늘에서야 나오니, 을해년에 분당한 사람들은 너무 심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그러나 이경중은 동인·서인의 분쟁과정에서 서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언제나 너무 완강하고 격렬한 것을 속으로 걱정하였다.[비문]
1581년(선조 14)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은 전주(全州) 출신 정여립(鄭汝立)의 학문이 고매하다며 그를 이조에서 발탁하도록 적극 추천하였다. 이때 이조 좌랑이경중은 “이 사람을 발탁하여 높이 쓰면, 뒷날에 반드시 사림(士林)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며 홀로 반대하였다. 이때 장령정인홍(鄭仁弘)과 지평박광옥(朴光玉)이 이조 좌랑이경중을 탄핵하면서 이경중은 이조 좌랑에서 교체되었다. 그때 이발(李潑)이 그의 아우 이길(李洁)을 시켜서 이경중 3형제를 만나보고 오라고 하였는데, 이길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경중의 3형제를 만나보니, 그의 형 이성중(李誠中)은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지만, 그의 동생 이양중(李養中)은 노여워하는 말이 있었고, 이경중은 기뻐하는지 노여워하는지를 통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비문] 이후, 고향인 전주(全州)로 낙향한 정여립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나갔는데, 1589년(선조 22) 결국 정여립이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정씨(鄭氏) 왕조를 세우려고 역모를 했다는 황해도관찰사한준(韓準)등의 고변이 접수되면서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역모의 관련자들이 차례로 의금부로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결국 자살하였다. 그해 12월, 선조가 조정의 신료들에게 “이를 예견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신의 친구 이경중(李敬仲)이 일찍이 정여립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도리어 배척을 당하여 불우하게 죽었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그를 배척한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유성룡은 “신은 잊었습니다마는, 사관(史官)이 알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선조가 사관에게 물으니, 사관이 아뢰기를, “장령(掌令)정인홍(鄭仁弘)과 지평(持平)박광옥(朴光玉)입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는 정인홍과 박광옥 두 사람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죽은 이경중을 특별히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贈職)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2년 12월 8일)
1584년(선조 17) 이경중이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 전해에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 과정에서 서인이 승리하면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동인이 패배하였는데, 이 일로 동인의 중진 노수신(盧守愼)·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이원익(李元翼)·김우옹(金宇顒)·김효원(金孝元)·강서(姜緖) 등 43명이 귀양을 가거나 파직 당하였다. 그때 허봉(許篈)은 갑산(甲山)으로, 송응개(宋應漑)는 회령(會寧)으로 각각 귀양을 갔으나, 대사헌정철은 동인의 죄를 가중(加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사헌부 집의이경중은 “이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류(士類)인데, 또 무슨 죄를 여기에 다시 추가하려고 합니까.” 라고 반대하면서 정철의 음모를 저지시켰다. 정철은 또 “함경도 관찰사(觀察使)권극례(權克禮)가 동인의 죄인들과 친하기 때문에, 귀양 가는 이들 죄인들을 후하게 대해 주느라, 함경도 군읍(郡邑)에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라며, 감사권극례를 논죄하려고 하자, 지평이경중이 이를 막으니, 정철이 이경중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온 이경중은 “나는 소인(小人)과 더불어 일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며 탄식하고, 사헌부 지평을 사직한 후,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대사헌정철이 마침내 지평이경중을 헐뜯으니, 선조가 노여워하여 권극례를 관찰사에서 교체시켰을 뿐 아니라, 이경중을 파직하고 경상도 추쇄어사(推刷御史)로 나가게 하였다. 도망한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원망을 많이 사는 일이었으므로, 전임자들은 대부분 꾀를 내어 추쇄어사를 회피하였지만, 이경중은 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명을 받자마자 “어사의 일이 엄중하니, 병을 빙자할 수 없다.”며, 즉시 길을 떠났는데, 결국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던 것이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는 충청도 병마우후(兵馬虞候)조언충(趙彦忠)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유혼(李幼渾)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지냈고, 차남 이유순(李幼淳)은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지냈으며, 딸은 황주 판관(黃州判官)박기준(朴耆俊)에게 시집갔다.
부인 조씨(趙氏: 1545~1608)는 남편 이경중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3년 동안 초상(初喪) 때와 똑 같이 항상 곡하였고, 거의 6년 동안 머리를 한 번도 빗지 않았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있은 후, 나라에서 특별히 남편 이경중에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서하고 제문(祭文)을 내려주자, 비로소 머리를 감고 재계(齋戒)하였다고 한다. 부인 조씨는 아들 둘에게 반드시 옳은 길로 가도록 교육하였는데, 두 아들이 행동을 올바르게 하고, 이름을 떨친 것은 모두 부인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인 조씨는 남편보다 나이가 3세가 적었는데, 남편 이경중이 돌아간 뒤에 24년을 더 살다가, 1608년(선조 41) 12월 22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남편 이경중의 묘소에 합장(合葬)되었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갈암집(葛庵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악록집(岳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미암집(眉巖集)』
- 『 송강집(松江集)』
- 『기언별집(記言別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