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행궁(義州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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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에 선조가 왜군의 대규모 침략을 받아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가서 임시로 거처하던 행궁.

개설

왕이 궁궐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이 행궁이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왕이 어떤 곳에 행(幸)한다는 의미 자체가 그곳을 행궁으로 만드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대부분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陵幸), 원행(園幸), 강무(講武), 온행(溫幸)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런데 왕은 행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곳이 많았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 남한행궁과 북한행궁은 산성 내부에 위치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왕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왕 전용의 행궁이었다.

의주행궁(義州行宮)은 인조가 두 차례의 호란 때 이용한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행궁처럼 외침에 따른 비상시국에 조성한 행궁이다. 특히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행궁은 호란 이후에도 중건 및 보수되어 지속적인 관리를 한 반면, 의주행궁은 임진왜란 때 선조만 이용한 곳이다. 따라서 의주행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행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한 경우에 이용된 행궁이다. 선조가 의주행궁에 머문 것은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것이었다. 선조는 도성을 탈출한 뒤 요동으로 망명할 의도였으므로 의주행궁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왜군이 임진강을 점령하고 북상 중일 때 영변행궁에서 선조가 호종한 신하들과 논의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면서 안남국이 멸망하고 그 후예가 명나라에 입조하자 다시 나라를 회복해 준 사례가 있으니 왕비와 비빈을 대동해서 요동으로 가겠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호종 신하들은 선조가 요동으로 간다는 소문 때문에 민심이 해이해졌으며 전세를 더 두고 보면서 관망하자고 하였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따라서 의주행궁은 선조가 파천할 곳으로 정해 두고 준비한 행궁이 아니었다.

위치 및 용도

의주행궁은 평안북도 의주목의 성내에 위치한 관사였다. 1592년(선조 25) 왜군의 침략으로 한양이 함락되는 전시 상황에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해 와서 관사를 임시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왕 일행은 의주행궁이 전시의 임시 행궁이긴 하나 한양의 궁궐에서 거행하던 의례 절차에 맞추어 생활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명나라 칙사가 왔을 때 의주성 안에 있던 용만관(龍灣館)에서 영접하는 것은 근정전에서 하는 것과, 성 밖에 있던 의순관(義順館)은 태평관(太平館)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당시에 장관(將官)들이 의순관에 머물렀기 때문에 칙사가 있을 곳이 없었다. 따라서 명나라의 칙사는 용만관에서 영접하고 그곳에서 머물게 했다(『선조실록』 25년 9월 1일).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했을 때는 선조가 행궁의 별전에서 특진관(特進官), 참찬관(參贊官), 시강관(侍講官), 검토관(檢討官), 가주서(假注書), 기사관(記事官) 등과 함께 『주역(周易)』을 강(講)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8년 2월 22일). 이외에 선조가 의주로 올 때 호위한 호위장사(扈衛將士)에게 호조(戶曹)의 명주 50필과 목면 50필을 내어 용만관에서 활 쏘기를 시험하고 차등 있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8월 9일).

변천 및 현황

의주행궁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칙사를 맞이하거나 명나라 장수들을 영접하는 것에 주력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1일). 또한 전국에서 보고되는 전황에 따라 왜적에 대처하였다. 다만 선조가 도성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다시 행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1909년(융희 3) 대한제국기에 순종이 의주를 방문했을 때 다시 행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1910년(융희 4) 일제의 강점 후로는 행궁의 기능을 상실하고 해체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09년 1월에 순종이 한반도 북부를 순행할 때 의주행궁에 유숙하였다. 순종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다는 취승당(聚勝堂)에서 국난을 극복한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취승당은 영조가 어제를 내려 현판을 단 곳이기도 하다. 또한 순종은 당시 의주에 선조를 호송한 사람들의 후손을 취승당에 불러 모아 선온(宣醞)하였다(『순종실록』 2년 1월 29일).

참고문헌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西巡幸 연구:『西巡幸日記』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1, 2011.
  • 정해은, 「조선후기 선조(宣祖)에 대한 현창과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6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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