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부(義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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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의주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의주부(義州府)는 고려시대에 북방 개척으로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할 때 옛 영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고려초의 거란족, 고려말의 원나라, 고려말 조선초의 여진족 등 이민족의 침략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압록강을 사이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평화로울 때는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사신단의 출입이 빈번하였지만,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될 때는 적이 침입해 오는 직접적인 관문에 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찍부터 정3품의 목사를 두어 관할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2품의 부윤을 두어 관할하면서 지방행정과 국방, 외교, 무역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의주부는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방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강계, 위원, 이산, 벽동, 창성, 삭주와 함께 강변 7읍으로 불렸다. 고려초에 서희(徐熙)의 외교적 담판에 의해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란으로부터 넘겨받아 강동6주를 확보할 때 진을 설치한 이후 고려의 최전방으로 인식되면서 국방상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특히 4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으므로 천리장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하였다. 고려말에는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면서 60여 성이 원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수복하였으며, 이후에는 변경 방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의주목(義州牧)으로 승격하여 관할하였다. 1388년(고려 우왕 14)에는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 머무르다가 회군을 단행하여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서북 지방의 최북단으로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이 전별연을 베푸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곳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주로 외국 사신 접대를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폐단이 심각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1592년(선조 25)에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나 의주부에서 6개월을 머물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조선의 관군 및 의병의 활약으로 도성을 탈환한 후 환도하였다. 1593년(선조 26)에 의주목을 의주부로 승격하고 종2품의 부윤을 두어 지방행정 및 변방 경계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후 병자호란 때는 의주부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임경업(林慶業)이 400명의 병력으로 저항했고,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청천강 이북의 서북 지방 8개 고을이 모두 점령되었으나 의주는 건재하였다. 이때 의주부의 허항(許沆) 등이 이끄는 관군과 김견신(金見臣)의 의병들이 용천을 회복하면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 평안도 지역에서는 안주(安州)·정주(定州)·의주에만 정3품의 목사(牧使)를 두었다. 의주부는 그 아래에 종5품의 판관(判官) 1명과 종9품의 역학훈도 1명을 두어 행정을 관할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동반과 서반의 토관직 부서와 정원을 정하였다. 토관직은 지방의 효율적인 행정 운영과 군사조직 강화를 위해 지역의 토착인을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동반 토관직에는 도감사(都監司)는 도위(都尉) 1인, 승(丞) 1인, 주부(注簿) 1인을, 전례국(典禮局)은 영(令) 1인, 주부 1인을, 전빈서(典賓署)는 주부 1인, 직장(直長) 1인, 녹사(錄事) 1인을, 영작원(營作院)은 판관 1인, 녹사 1인을, 사창서(司倉署)는 직장 1인, 녹사 1인을, 사옥서(司獄署)는 녹사 1인, 부록사(副錄事) 1인을, 전주서(典酒署)는 직장 1인, 녹사 1인, 부록사 1인을 두었다. 이것이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도할사(都轄司)에 종6품의 도할(都轄) 1명과 정7품의 전사(典事) 1명, 전례서(典禮署)에 종6품 감부(勘簿) 1명, 종8품 급사(給事) 1명, 종9품 섭사(攝事) 1명, 융기서(戎器署)와 사창서(司倉署)에 종7품 장사(掌事) 각 1명, 섭사 각 1명, 전주국(典酒局)에 급사 1명, 섭사 1명,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1명을 두는 것으로 법제화되었다.

이러한 동반 토관직은 조선후기 『대전회통』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반 토관직에는 진강위(鎭彊衛)에 1령(領)은 사직(司直) 1명, 섭사직(攝司直) 2명, 사정(司正) 1명, 섭사정(攝司正) 2명, 부사정(副司正) 1명, 섭부사정(攝副司正) 2명, 사용(司勇) 2명, 섭사용(攝司勇) 2명, 대장(隊長) 5명, 대부(隊副) 10명으로 하고, 2령은 섭부사직(攝副司直) 3명, 섭사정 3명인, 섭부사정 3명, 섭사용 4명, 대장 6명, 대부 10명을 두었다. 동반은 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서반은 군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선조 때 종2품의 부윤으로 승격하였고, 부윤은 의주진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하면서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조선후기에 늘어나는 무역 거래와 사신 접대의 일로 역학훈도 1명을 증원하였다.

의주 일대에서 중국과의 상품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중강개시(中江開市)·중강후시(中江後市)가 발달하였고, 책문(柵門)을 거점으로 밀무역도 진행되어 의주부 관원들의 직무 가운데 이를 통제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특히 인삼의 밀무역을 방지하는 일과 거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막기 위해 역학훈도를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세종 때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평안도의 의주, 삭주, 이산, 창성, 벽동, 강계 등의 지방관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부임하도록 하였다.

변천

의주부는 고려시대에 용만현(龍灣縣), 화의(和義) 등으로 불렸다. 992년(고려 성종 12)에 서희의 외교로 고려 영토로 수복되어 강동6주의 하나인 흥화진(興化鎭)을 설치하였다. 이후 1117년(고려 예종 12)에 남도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를 두어 국방 경계를 강화하였다. 1221년(고려 고종 8)에 윤장(尹章) 등의 반란사건이 일어나 등급을 낮추어 함신(咸新)이라고 고쳤다가 다시 회복하였다. 1269년(고려 원종 10)에 원나라의 동녕부에 속했다가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복구된 후 1366년(고려 공민왕 15)에 의주목이 되었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는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좌정군(左精軍), 우정군(右精軍), 충신군(忠信軍), 의용군(義勇軍)의 사군(四軍)을 두고 각각 상천호(上千戶)와 부천호(副千戶)를 두어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의주목에 소속된 관할 지역은 정주목, 인산군, 용천군, 철산군, 곽산군, 수천군, 선천군, 가산군, 정녕현의 9개 고을이었다. 1402년(태종 2)에 판관을 두고 정주진(靜州鎭)과 위원진(威遠鎭)을 소속시켰다. 세조 때 전국의 주요 요충지에 진관(鎭管)을 설치하면서 의주진관이 설립되었고, 철산(鐵山)과 용천(龍川)의 두 군을 관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몽진하여 의주에서 6개월간 머물렀으며(『선조실록』 25년 6월 26일), 이듬해 서울로 환도한 뒤에는 의주부민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정3품의 의주목사를 종2품의 의주부윤으로 승격하여 이것이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선조실록』 26년 6월 15일).

조선시대 중국과의 접경 지역으로 사신이 오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고, 이민족이 침략하는 첫 번째 통로이기도 해서 역사적 명과 암을 모두 간직했던 곳이다. 1895년(고종 32)에 부군제(府郡制)를 실시함에 따라 의주부는 23부 중의 1부가 되어 의주·창성·벽동·삭주·용천·철산·선천·곽산·정주·가산·박천·태천·구성의 13개 군을 관할하였고, 이듬해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평안북도 의주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제6권, 201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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