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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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에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한 관원.

개설

의서습독(醫書習讀)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의학 교육을 실시하면서 강조되었다. 태조는 고려시대의 의서를 중심으로 향약을 개발하고 의학 교육에 힘썼으며, 태종은 의원들이 읽었던 의서에 대해서 시험토록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의서를 읽어 의원들의 미숙함을 지적하기도 하는 등 의학 독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북경에서 의서를 구입해 부족한 의서를 충당하였으며, 의원들이 읽기에 편하도록 춘추관에 소장된 의서를 내약방에 소장토록 하여 의학 도서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의약집성방』을 편찬 보급하여 의생들에게도 의서를 읽고 의술을 읽히도록 하였으며, 각 전문 기관에도 습독관을 설치하여 전문인을 양성하였다.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은 건국 초기부터 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습독을 권장하면서 세종대에 이르러 훈련원에 무경습독관(武經習讀官), 승문원에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등을 설치할 때 함께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서습독관으로는 삼의사(三醫司) 즉, 전의감(典醫監), 혜민국, 제생원을 비롯하여 생원, 진사, 사족 중에서 젊고 총명한 인재를 선발하여 양성하였다. 이들은 의생들과 달리 당시에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의서습독에 전념하여 조선시대의 의학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 습독관은 내의원(內醫院) 및 삼의사에 소장된 방서(方書)를 습독청에 모아 이를 강독 연구한 뒤 내의원, 전의감, 혜민국 등에 의사로 채용되었다.

정원은 처음에는 9인을 두었으나 15인으로 늘리고, 1462년(세조 8)에 30명으로 늘려 『경국대전』에 30명으로 확정되었다.

1453년(단종 2)에는 선발된 습독인은 매월 시험을 보고, 4맹월(孟月)의 취재 시험에서 봄에는 오경(五經)을 보고, 여름·가을·겨울에는 사서(四書)를 보아 성적순으로 점수가 가장 많은 자는 관직을 제수하고, 그중 의술에 정통한 자는 특차로 동반직에 제수하되 태만한 자는 논죄하여 파직시킨다는 규정을 정하였다. 이듬해인 1454년(단종 3)에는 습독인을 4맹월에 예조에서 취재하면 혼잡하고 습독인이 꺼리는 경향이 있다 하여 전의감 제조(提調)와 예조(禮曹) 당상(堂上) 및 겸임 집현전 관원이 전의감에 모여 매월 한 번씩 평가를 하여 점수에 따라 서용하도록 규칙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458년(세조 4)에는 습독관이 노친 봉양, 신병, 상중일 경우에는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서용하도록 했으며 다른 직업으로 전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현관(顯官)을 받았다든가 과거에 합격해도 본업에 충실토록 했으며, 인사이동이 있을 때에도 제조가 경력을 조사하여 출척(黜陟)의 근거로 삼도록 하였고, 의학에 전념하지 않는 사람은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만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하여 1462년에 다시 규칙을 설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이를 대폭 보완하여 습독관 규칙을 다시 만들었다.

1463년(세조 9)에 예조에서 제정한 의서습독관의 권징조건(勸懲條件)을 보면 “의서습독관 30인을 3번(番)으로 나누어 3일씩 서로 교체하여 항상 내의원에 출사하게 하고, 방서를 상고하여 병을 보고 진후(診候) 등의 일을 하게 한다. 내의원 같은 것은 전의감 제조와 본조 당상이 성균관의 월강(月講)하는 예에 의하여 매월 전의감에 앉아서 읽은 제서(諸書)를 강(講)하여, 통(通)하고 불통(不通)한 것을 기록해두었다가 체아(遞兒)를 수직(受職)할 때, 그 획수(畫數)를 상고하여 서용하고, 삼의사에 궐원(闕員)이 있으면 체아를 불계(不計)하여 보충 임명하되, 그중에서 뛰어난 자는 현관을 제수하고, 불통한 것이 가장 많고 게으른 것이 현저한 자는 고신(告身)을 거두어 의사(醫司) 사령(使令)으로 정하였다가 그 획수를 상고하여 본임(本任)에 되돌린다.”고 하였다(『세조실록』 9년 5월 22일). 1489년(성종 20)에는 이들에게 체아직을 주었으며, 구사(丘史)를 주고, 음식도 제공하였다(『성종실록』 20년 3월 7일).

이들이 읽었던 종합 의서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는 교육용이나 의원들이 참고용으로 사용하였다. 주로 취재 과목이나 과거의 시험 과목이 되는 전문 의서가 독서 자료로 이용되었는데, 그중 『창진집(瘡疹集)』·『태산집요(胎産集要)』·『구급방(救急方)』은 국내 의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담당 직무

의서습독관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여 의서를 읽고 공부하는 데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변천

의서습독관은 세종대부터 둔 것으로 보이지만, 세조대에 와서 그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성종대에 이르러 더욱 활성화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김중권, 「조선초 의서습독에 관한 연구:의서습독관을 중심으로」, 『서지학연구』 15,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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