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화당(挹和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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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읍화당 |
한글표제 | 읍화당 |
한자표제 | 挹和堂 |
상위어 | 경덕궁(慶德宮), 경희궁(慶熙宮) |
동의어 | 읍화당(浥華堂) |
관련어 | 경휘전(敬徽殿), 숙녕전(肅寧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지혜 |
장소 | 경희궁 |
관련 인물 | 인열왕후(仁烈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읍화당(挹和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28년 2월 25일, 『영조실록』 7년 4월 21일, 『영조실록』 1년 8월 22일, 『현종개수실록』 10년 8월 23일, 『숙종실록』 14년 5월 5일 |
경희궁의 정전 영역 서편에 있는, 혼전 혹은 신주를 봉안한 건물.
개설
읍화당(挹和堂)은 경희궁 창건 시 자정전(資政殿)의 서편에 건립되었다. 인조는 경희궁에 머물 때에 읍화당에서 신하들을 만나고 강독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에 인조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혼전인 숙녕전(肅寧殿)을 읍화당에 모신 이후부터 주로 혼전 혹은 영정이나 신주를 임시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의 정전 영역 서편에 위치하여 지형이 높고 궁궐의 일상공간과 분리되어 제례를 행하기에 적합하였다.
위치 및 용도
읍화당은 경희궁의 북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위선당(爲善堂), 동쪽으로 자정전이 있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이 그려진 시기에는 읍화당 부근에 태녕전(泰寧殿)이 있었다.
읍화당을 사용한 사례를 살펴보면, 혼전이 설치되거나, 종묘 증축 시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거나, 국상이 있을 때 신주가 될 나무를 깎아 봉안하거나, 신위나 영정을 새롭게 만들어 임시 봉안하는 곳 등으로 사용되었다.
처음 혼전으로 사용된 것은 1647년(인조 25)이었다.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혼전인 숙녕전을 읍화당에 모시면서 혼전의 격식을 갖추기 위한 수리공사가 이루어졌다.
1702년(숙종 28)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 국상 중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후의 혼전에 조문하는 제례를 행하고자 하였다. 이때 인현왕후의 혼전은 문정전에 있었으나, 읍화당에 혼전을 허설(虛說)하여 청나라 사신의 조제(弔祭)를 행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8년 2월 25일). 이를 전례로 하여 1731년(영조 7)에 선의왕후(宣懿王后) 국상으로 청나라 사신의 조제를 받을 때에도 읍화당에 혼전을 임시 설치하여 사신의 조제를 받고 읍화당 동쪽 숭정전(崇政殿)에서 사신과 다례를 나누었다(『영조실록』 7년 4월 21일). 이처럼 왕후의 혼전에 청나라 사신의 조제가 있을 때에는 실제 혼전으로 사신을 들이지 않고 임시 혼전을 마련하여 격식을 갖추되 왕후의 혼전을 보호하였다.
『승정원일기』 1663년(현종 4) 4월 5일 기록에 따르면, 1663년에 종묘의 영녕전(永寧殿) 증축을 계획할 때 영녕전에 모시던 신위를 옮겨 모실 장소를 모색하였다. 이때 비어 있던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과 그 서편에 있는 영경당과 읍화당을 선택하였다. 서쪽이 위계가 높아 영경당인 위선당, 읍화당, 자정전의 순서로 위계에 따라 배치하여 신위를 임시 봉안하였다.
1667년(현종 8)에 종묘 증축시를 상고하였고, 1725년(영조 1)에도 위선당·읍화당·자정전에 종묘의 신위를 옮겨 모시고 제례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종묘의 공사를 행했다(『영조실록』 1년 8월 22일). 그 밖에도 새로 신주를 만들거나 영정을 그려 임시 봉안해야 할 때 읍화당을 적합한 장소로 활용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왕후의 신분으로 복위시키고,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 읍화당에서 신주를 만들어 임시 봉안한 후 길일을 선택하여 종묘에 모셨다(『현종개수실록』 10년 8월 23일). 1688년(숙종 14)에는 새로 모사한 태조의 영정을 읍화당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남별전에 모셨다(『숙종실록』 14년 5월 5일). 1680년(숙종 6)에는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국상에서 빈전을 융복전(隆福殿)에 마련하고 연제(練祭)가 행해지는 1년 동안 사용할 우주(虞主)를 자정전 월랑에서 만들어서 읍화당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발인할 때에 빈전으로 들여 국장 행렬과 함께 산릉으로 가서 장례를 마친 후 신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전례로 하여 인현왕후의 우주도 읍화당에 봉안하였다.
주로 혼전으로 활용되거나 신주를 모시는 곳은 편전과 같이 규모와 격식을 갖춘 건물을 선택한다. 또 혼전의 경우에는 당가를 설치해야 하므로 실내의 높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읍화당은 그 정도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1620년(광해군 12)에 경희궁이 완공되었을 때, 자정전 서편에 읍화당이 자리 잡았다. 1647년(인조 25)에 인열왕후 한씨의 혼전으로 활용된 이후 1731년(영조 7)까지 혼전으로 사용되거나, 신주를 임시 봉안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궁궐지(宮闕志)』가 기록된 정조 대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1733년 이후 읍화당을 태녕전으로 변경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1744년(영조 20)에 태녕전이 중수되면서 읍화당의 모습은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선의왕후]혼전도감의궤([宣懿王后]魂殿都監儀軌)』
- 『[인경왕후]국장도감도청의궤([仁敬王后]國葬都監都廳儀軌)』
- 『[인현왕후]국장도감도청의궤([仁顯王后]國葬都監都廳儀軌)』「서궐도안(西闕圖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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