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저주옥(乙酉詛呪獄)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을유저주옥 |
한글표제 | 을유저주옥 |
한자표제 | 乙酉詛呪獄 |
상위어 | 옥사(獄事), 저주(咀呪)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변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발생시기 | 1645년(인조 23) |
관련 인물/집단 | 강빈(姜嬪), 봉림대군(鳳林大君),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仁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을유저주옥(乙酉詛呪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3년 4월 26일, 『인조실록』 23년 9월 10일, 『인조실록』 24년 1월 3일 |
1645년(인조 23) 궁중에서 있었던 저주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옥사.
개설
1645년(인조 23) 궁중에서 발생한 저주와 관련해서 발생한 옥사이다. 이 사건에는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姜嬪)이 연루되었고, 강빈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을유년 저주사는 인조대 후반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봉림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병자호란 이후 심양(瀋陽)에서 인질로 생활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북경을 장악한 이후 귀국이 허용되었고[『인조실록』 22년 12월 4일], 1645년(인조 23) 2월 귀국하였다[『인조실록』 23년 2월 18일].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약 2달여가 지난 뒤인 같은 해 4월에 창경궁 환경당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인조실록』 23년 4월 26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원손(元孫) 책봉에 대한 조야(朝野)의 요구가 제기되었다[『인조실록』 23년 5월 20일]. 이런 상황에서 국왕은 영의정김류(金瑬)를 비롯해 좌의정홍서봉(洪瑞鳳) 등 16인을 조정으로 부른 뒤에 형세상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삼았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왕세자로 내정된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의 상에 조제(弔祭)를 위해 파견되었던 칙사를 접대하는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8일] [『인조실록』 23년 윤6월 10일].
발단
사건은 1645년(인조 23) 8월 20일 발생하였다[『인조실록』 23년 8월 20일]. 이에 앞서 인조대에는 여러 번의 저주를 둘러싼 옥사가 발생한 바 있는데[『인조실록』 23년 6월 12일] [『인조실록』 21년 7월 21일], 특히 이 사건은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姜嬪)과 원손의 칭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던 소현세자 아들의 보모인 상궁 최씨까지 연루되어 화를 당한 사건이어서 주목된다.
이 사건은 당시 소현세자의 궁인으로 강빈과 친밀했던 신생(辛生)이 이를 고발하면서 비롯된 듯하다. 후일 신생 및 여종이었던 애순(愛順) 등을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저주 광경이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당시의 저주 사건은 몇 가지 행태로 진행되었다. 먼저 궁궐 여기저기에 흉물을 묻었으며, 강빈이 가음금(加音金)에게 사람의 뼈를 구해오도록 시켰고, 가음금이 두개골과 팔뼈, 다리뼈 등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또 뼈를 부수어 광주리에 담아 4차례 정도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한 강석기(姜碩期)의 아내이자 강빈의 어머니도 역시 저주하는 물품을 궁궐로 들여보냈다고 하였다.
경과
저주와 관련해서 사건 초기에 국문을 당한 궁녀 계향(戒香)과 계환(戒還)이 내옥(內獄)에서 죽었다. 이들은 모두 강빈의 궁녀들인데 자복하지 않고 사망하였다(『인조실록』 23년 9월 10일). 이어 대사간조경(趙絅)은 아산에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시사를 언급하는 가운데 관련자들을 내옥에 가두고 내관을 시켜 죄를 다스리는 일들을 옳지 않다고 비난한 바 있다[『인조실록』 23년 11월 27일].
1646년(인조 24) 1월 초 국왕이 자신이 먹는 전복구이에 독약이 들었다고 하여 궁인인 정렬(貞烈)·계일(戒一)·애향(愛香)·난옥(難玉)·향이(香伊)·천이(賤伊)·일녀(一女)·해미(奚美) 등을 내옥에 하옥하고 내관에게 국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강빈 역시 혐의가 있다고 하여 후원의 별당에 유치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사건이 불거졌다(『인조실록』 24년 1월 3일).
옥사와 관련되어서는 그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같은 해 2월 3일 국왕은 강빈을 의심하여 처벌하기 위해 영의정 등을 불러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 인조는 강빈이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붉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놓고 내전(內殿), 즉 왕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어 강빈을 내전으로 부른 환관의 처벌은 물론이고 강빈의 형제인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 등의 체포와 심문이 진행되었고, 급기야 2월 12일에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인조실록』 24년 2월 12일].
그리고 지난해에 발생한 저주 옥사가 새롭게 조사되면서 저주 옥사를 처음 고발한 신생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관련자로 애순을 비롯해 가음금·복기(福只)·돌쇠[乭金]·옥남(玉男)·끝덕[末叱德]·끝향[末叱香]·자근춘(者斤春)·자근개(者斤介)·종생(從生)·순례(順禮)·최득립(崔得立)·종례(從禮) 및 예옥(禮玉) 등이 사형을 받고 죽었다. 이밖에도 해당 사건을 둘러싸고 불복하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 조사 과정에서 강빈의 어머니까지 연루되어 장살되었다.
이 사건은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사건 이후 강빈의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1654년(효종 5) 김홍욱(金弘郁)은 강빈 옥사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며 그녀의 신원을 주장하다가 결국 장살되었다. 이후 효종 후반에 김홍욱이 신원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결국 강빈의 신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1718년(숙종 44)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김용덕, 「소현세자 연구」, 『사학연구』18, 1964.
- 이왕무, 「소현세자빈 강빈의 옥사와 신원」, 『역사와 담론』69, 호서사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