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대집(銀臺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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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 후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시문집이다.

개설

이인로 자신이 평생에 지은 저서를 모아 손수 편찬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은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의 규모는 『고려사(高麗史)』의 이인로 열전에 의하면, 원집 20권, 후집 4권의 방대한 저술이었다고 한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인로가 지은 시문집이다. 저자의 본관은 인주(仁州)이고, 초명은 득옥(得玉)이며, 자는 미수(眉),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 밑에서 자랐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을 피해 승려가 되기도 했다. 환속하여 1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14년 간 사국과 한림원에 출입했다. 당시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재·임춘 등과 죽림고회를 만들고 시와 술을 즐겼는데, 중국의 죽림 7현(竹林七賢)을 흠모한 문학 모임이었다.

그의 문학세계는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했으며, 문은 한유의 고문을 따랐고, 시는 소식을 숭상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을 저술하여,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열었다. 이 책에는 자작시가 많이 들어 있는데, 자작시만 들어 있는 것도 13화(話)에 이르고 있다. 또한 그는 용사(用事) 위주의 시론을 전개했다. 즉 시를 지음에 있어서 용사의 정묘함을 제일로 쳤으나,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험벽(險僻: 뜻이 어렵고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이런 글자가 들어 있으면, 시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함)한 용사는 배격했으며, 남의 문장을 본떠서 형식을 바꾸어도 새로운 뜻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좋은 시란 표현기교가 뜻을 따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갈고 닦는 공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천연미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저서로 『은대집(銀臺集)』 20권, 『후집(後集)』 4권, 『쌍명재집(雙明齋集)』 3권, 『파한집』 3권을 저술했다고 하나, 현재 『파한집』만 전하며, 『동문선』과 『보한집』에 120여 편의 시문이 남아 있다.

서지 사항

원집 20권, 후집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구성/내용

이 책의 내용은 이인로의 아들 이세황(李世黃)의 『파한집발(破閑集跋)』에 의하면, 고부(古賦) 5수, 고시와 율시 1,500여 수였다고 전한다.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권보(權溥)의 묘지명에, “은대시집 20권을 주(註)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권보에 의하여 주석 작업이 진행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은문고(牧隱文稿)』의 「증김경숙비서시서(贈金敬叔秘書詩序)」라는 글에, “공장(工匠)의 졸렬함과 권질(卷秩)의 무거움은 은대집·상국집(相國集)에서 볼 수 있다.”고 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과 함께 이 문집은 방대한 저작의 대표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서는 『쌍명재집』 3권, 『파한집』 3권이 세상에 전해진다고 하여, 조선 초기까지만 하여도 이 책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나, 그 이후에는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의의와 평가

기로회(耆老會)에서 지은 잡저만을 묶은 『쌍명재집』, 그리고 당시의 시화·일사인 『파한집』과 함께 이인로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참고문헌

  • 김연실, 「『파한집』에 나타난 이인로의 문학론 연구」, 공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 박성규, 「이인로의 시세계 소고-도가적 성향의 시를 중심으로-」, 『한문교육연구』 제27호, 한국한문교육학회, 2006.
  • 이관성, 「미수 이인로의 시세계 연구의 일단」, 『한문교육연구』 제28호, 한국한문교육학회, 2007.
  • 최경환, 「이인로와 진화의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 시 대비」, 『한국고전연구』 1권, 한국고전연구학회, 1995.